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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Nov 28. 2020

여행준비의 기술/방랑자들/철학자의 여행법

95 그리고 2의 시기에 읽는 세 권의 여행 책

 95 그리고 2. 전자는 코로나 백신 임상시험 최종 결과로 발표된 면역 확률, 후자는 11월 24일 0시부로 격상된 수도권 방역 단계에 해당하는 숫자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다리게 만드는 숫자지만 2를 47.5번이나 곱해야 얻을 수 있는 큰 숫자라서 그런지, 여전히 백신은 손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반면 숫자 2는 참 작다. 작은 만큼 손끝에 금세 와 닿는다. 엄지와 검지를 접는 찰나의 순간으로 2는 만들어진다. 코로나에 잠시 방심한 찰나를 틈타 방역 단계 2단계로의 격상은 삶을 또 한 번 파고들었다.

      

 일상마저 쉬어 가는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 당치도 않다. 도대체 이 시국이라는 말을 얼마나 더 써야 할는지, 전국의 ‘이시국’ 씨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얼마 전 사촌 동생(초6)이 이모와 기 싸움을 하며 핸드폰 게임을 더 하려는 걸 봤다. 동생 핸드폰을 없애버리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어이구, 너네도 똑같았어!” 하신다. 틀린 말이다. 게임하느라 밤새운 건 내가 아니라 형이었으니까. 바로 반박했더니 어머니는 수긍하시며 얘는 게임할 시간에 밖에 싸돌아다녔다고,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셨다. 몇 살부터였을까. 콕 짚어 말할 순 없어도 역마살은 오래전부터 내재된 성향이었다.


 코로나로 제동이 걸린 케케묵은 역마살을 어떻게든 풀고 싶어  권의 ‘여행책을 골랐다. 여행을 떠나기 , 여행 중에,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후에 읽으면 좋을  권의 . 같은 들으면 좋은 노래도   소개한다.      


여행 前,

 <여행 준비의 기술> 박세영 / 글항아리     

 

 술술 읽힌다. 여행을 앞둔 친구가 한껏 들뜬 채로 여행 가서 뭐할지, 뭐 먹을지, 뭘 볼지 ‘썰’푸는 걸 듣는 듯했다. 저자는 여행이 아닌 ‘여행준비’가 취미다. ‘특이하네.’라며 읽어 가다 보면 묘하게 공감 가는 구석이 많다. 현지 말을 조금씩 공부하거나, 실제 가는 게 아님에도 비교 검색 사이트에서 항공권과 호텔을 검색하는 행동들. 앞으로 내 취미란에도 여행 대신 여행준비를 써도 되겠단 생각도 든다. 발품 팔아 정성껏 준비한 여행의 추억은 오래간다. 어떤 곳을 오래도록 꿈꿀수록, 가든 못 가든 그곳은 더 애틋해진다. 그간 여행을 계획하며 느낀 사적인 감정이 문장으로 점철되는 순간, 쾌감이 일기도 했다.     


희망을 많이 품을수록 그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때로는 희망 자체가 우리의 비루한 삶을 견딜 만한 힘을 준다.  
꿈꾸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인생에서 여행 스케줄 정도는 내 맘대로 짜도 된다.
여행의 진짜 즐거움은 준비하는 단계부터 시작해서 긴 시간 동안 추억을 곱씹는 과정 전반에 걸쳐 있다.


 여행준비에 대해서만 말한 건 아니다. 다녀온 곳에 대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 나름의 ‘랜선 여행’을 선보이기도 한다. 가보고 싶은 곳을 웹 지도상에 별로 찍어 둔다는 저자. 특히 미슐랭에서 별을 받은 식당을 종종 가본다고 한다. 유명 아이돌 콘서트의 ‘피켓팅’을 방불케 하는 예약 전선에 뛰어들면서까지. 미식 여행에 대한 관점은 앞서 공감한 몇몇 공통된 취향과 달리 정반대였다. 나는 현지 메뉴가 뭐가 있는지 찾아보는 게 전부다. 맛집은 굳이 찾지 않는다. 입소문에 인파가 몰린 곳은 더더욱 피한다. 내 성향이 이렇다 보니 책을 통해 ‘랜선’ 미식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웬만해선 안 할 여행이니 저자를 통해 대리 만족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랜선 여행.     

 웹 지도 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별을 찍으며 저자는 말한다.


이왕이면 더 반짝이는 곳으로, 인생은 짧고 여행 기간은 더 짧다.


 

 절대 저런 미식 여행은 안 할 거라 했는데,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이왕이면 더 반짝이는 곳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playlist♪ Jour 1 / Louane


Jour 10

Variation du délice.

Que voudrais-tu faire? Une balade en mer?


(여행) 10일차.

즐거움의 변주.

넌 뭘 하고 싶니? 바닷가 마실?












여행 中,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 민음사

    

 당황스러웠다. 116가지 여행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소설이라는데,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여행과 사뭇 달랐다. 공항과 기내의 풍경이 묘사되고,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가족도 등장하지만 아주 잠깐이다. 평범한 여행이 그려진 페이지를 지나자 잘려 나간 자기 다리의 근육, 신경, 세포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섬망증 환자 ‘필립 페르헤이언’의 이야기가 나온다. 페이지를 더 넘기면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박제 당한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달라는 ‘요제피네 졸리만’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재만 보면 으스스한 추리 소설인가 싶지만, 주제는 여행이다.


 <방랑자들>의 여행은 이동의 모든 개념을 포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제 ‘Bieguni’는 폴란드어로 ‘극(極)들’(복수형)이다.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으로의 모든 이동은 여행이자 방랑이다. 페르헤이언 이야기는 그저 미치광이의 이야기 같지만, 다양해진 요즘의 여행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웹으로 미술관을 관람하는 여행, 목적지와 출발지가 같은 항공 여행이 등장하는 판에 현미경으로 미세 조직을 관찰하는 여행을 못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동적인 존재’라는 책의 전제가 가장 잘 깔려 있는 것이 졸리만의 이야기다. 인간을 한 곳에 묶어 두는(박제)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말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집에 ‘콕’ 박제되어 여행도 일상도 포기해야 하는 지금 이 시국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어딘가에 일정 기간 머물다 보면, 금방 그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유전자가 없었다.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깡충깡충 뛰어다닐 뿐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떠난다는 하나의 개념 아래로 흘러들며 알고리즘을 만든다. 해부학 이야기가 알고리즘의 시작이 되어 섬망증 환자의 괴기한 여행과 박제 당한 시체의 여행을 불러온다. (세포 조직 관찰, 시신 박제라는 두 소재 해부학과 관련이 있으니까) 유튜브 볼 때 알고리즘에 이끌려 뜬 영상을 계속 보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6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 순식간에 읽힌다.


어떤 장소에 오래 머물면 그러한 매력은 점차 퇴색됩니다.
당신이 그것을 느끼는 순간, 뭔가가 당신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고 당신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거죠.

     

♪playlist♪ 국경을 넘는 기차 / 에피톤 프로젝트


출발하는 사람들

도착하는 사람들

여기저기 둘러보다

아슬아슬하게 오른 열차

  













여행 後,

<철학자의 여행법>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 / 세상의모든길들 

    

 난해하다. (제목에 ‘철학’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실제 철학자인 저자는 여행을 하나의 이론 체계처럼 만들어 배열한다. 여행 전·중·후로. 각 시점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가 겪는 인문, 지리, 철학적 고찰을 정리한 책이다. 이 유쾌한 여행을 이론으로 만들다니,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그가 제시한 이론(이라면 이론인 것)은 우리의 경험과 발맞춰 걷는다. 그 경험을 관통한 문장을 읽는 순간 ‘맞아, 여행 가서 그랬지.’라며 공감한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는 존재론적인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여행자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여행은 공허해진다.


앙코르와트를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봤다면, 속이 텅 빈 돌덩이였을 거다.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흔한 가이드북의 설명만이라도 괜찮다. 앙코르 톰 남문에 있는 동상이 우유 휘젓기 설화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그곳에 대한 감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거다. <여행준비의 기술>에서도 여행준비 그 자체의 즐거움만 말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더 반짝이는 곳으로 가기 위에 ‘별 위에 별’을 찍는 노력을 했기에 그 여행은 공허하지 않다.


여행이나 이동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다 소진해버린 기력과 에너지를 집에서 회복한다.
거주지는 또한 이동에 대한 흥분을 가라앉혀서 끝없이 방랑하는 것을 막아 주기도 한다.


<방랑자들> 속에 비친, 코로나로 인해 박제된 우리 모습이 가련해 어디든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영영 집을 떠나버리고 싶은 건 아니다. 여행(방랑)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유목 생활자 제외) 4개월간 여행했던 기억을 들추니 여행에 지쳐 ‘홈 스위트홈’을 외치던 모습도 보였다. 무거운 여행 가방은 방구석에, 지친 몸은 내 방 침대 위로 던지던 순간의 달콤함 역시 여행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부분이다. 물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 때문에 방랑을 멈추기도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푼 것 같지만, 모든 ‘개론서’는 원래 좀 난해하다. 원제 ‘Théorie du voyage’를 직역하면 ‘여행론(論)’이다. 그러니 ‘여행 개론서’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개론이지만 여행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야 난해한 문장도 쉽게 읽힐 테니, 여행 후에 읽으면 좋은 책으로 골랐다.


 일시적으로 멈춘 인상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곳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
핵심을 이끌어내고,
추억을 구상하는 빛나는 조각들을 표면으로 올라오게 할 수 있다.


 

여행은 잠시 멈췄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지난 여행의 추억 조각을 표면에 올리다 보면 어느새 여행을 떠날 날이 올 것만 같다.


♪playlist♪ Calling / 이지영(빅마마)


 이제 알아요.

 무엇을 위한 여행이었는지.

 내 영혼의 외침 멀리멀리 너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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