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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Feb 25. 2021

Hvala, 라라라

여행에세이,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닉

 언제부터인가 왼쪽 이어폰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산책할 때면 더운 여름날의 항구도시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꽤 답답했는지 고장난 왼쪽 이어폰은 빼고 오른쪽폰만 낀 채로 돌아다녔다. 목과 어깨의 경계 즈음에서 양갈래의 이어폰 선은 하나로 모였는데, 귀에 끼지 않은 왼쪽 이어폰이 뒤집어진 콩나물 모양으로 매달렸다. 걸을 때마다 발걸음에 맞춰 덜렁덜렁 흔들리던 왼쪽 이어폰. (두브로브닉 여행은 바야흐로 2013년도 였으니, 아직 무선 이어폰이 나오기 전이다)


 두브로브닉 구시가지 성곽을 한 바퀴 빙 돌아보기로 했다. 구시가지는 서울 같은 대도심에 비하자면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그래도 한때 도시의 기능을 역력히 해 낸 곳인만큼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도보로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따로 일행도 없었으니 산책하며 마주하는 풍경이 지겨워질 즈음부터 노래를 틀었다. 당시 고현정이 출연했던 커피 CF 촬영지로 한국 사람들도 많이 찾던 도시다 보니 왕왕 한국어가 들려왔다. 오른쪽 귀에서는 노래가, 왼쪽 귀에는 이름 모를 여행자들의 대화의 일부가 스쳤다. 노랫말 사이사이로 그들 대화 속 단어가 콕콕 박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가사가 되어 버렸다. 평소에 그다지 음악을 크게 듣지 않아서 듣던 노래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성곽 위를 계속 걸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을 걷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앞서 걷던 몇몇 중년의 여행자는 한 바퀴를 다 돌지 않고 중간에 나온 출구를 통해 성곽 도보 투어를 마쳤다. 십여 분 정도 걸으며 본 구시가지의 풍경은 처음에만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게 흥미로웠을 뿐, 황토빛 지붕이 덮인 건물이 모자이크처럼 정렬된 마을 모습에 금방 지루함을 느꼈다. 구시가지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성곽에서도 아드리아해가 보였는데, 그 풍경이 그때 나와주지 않았다면 나도 도보 투어를 자체적으로 끝냈을지 모른다.



 성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라니, 누군들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을까. 특히나 여행을 떠나온 연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포토존이다. 풍경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내게 양해를 구하며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한국인 전매특허의 열과 성의를 다한 사진 찍어주기 스킬을 시전했음에도 여전히 서비스 정신이 투철해 찍힌 사진을 확인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찍어준다고 했다. 다행히 둘 모두 흡족했는지 반음 정도 높아진 음색으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유유히 떠났다. 그때 그들은 'Thank you'대신 크로아티아로 감사 인사를 했다.


HVALA


 여행자가 아닌 현지 사람이었나. 이유야 어찌됐든 '흐발라'는 발음 자체가 묘하게 기분이 좋다. 그런데 마침 이어폰에 흘러 나오던 노래가 이수영의 '라라라' 였다. 후렴의 처음 네 마디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가사가, 그 뒤로 이어지는 네 마디는 같은 멜로디를 '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랄라~'로 허밍하듯 부르는 노래. 왼쪽 고막에 '흐발라'가 닿고 3초 정도가 지나니 후렴의 뒷 네마디가 오른쪽에 귀에 흘렀다.


Hvala. ...... 라라, 라라라~ 라라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타이밍인가. 혼자 피식,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성곽을 한 바퀴 다 도는 내내 이수영의 '라라라'를 반복 재생했다. 또 누군가 'Hvala'라고 절묘한 화음을 만들어 주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근데 걸으면 걸을수록 인파가 점점 줄어 출구에 다 왔을 즈음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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