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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Feb 23. 2021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생일 축하

여행에세이, 독일, 베를린

 예정된 베를린 여행 일정 앞에 2박을 붙여 숙박을 급하게 예약해야 했다. 뒤셀도르프에서 일하던 친구가 베를린으로 온다 하여 조율이 필요했던 건데, 성수기 시즌이기도 했고 유럽 젊은이에게 베를린이 굉장히 '핫'한 도시로 급부상했던 터라 만족스러운 가성비의 숙소를 찾기 힘들었다. 어차피 친구와 만나서 논다치면, 숙소에서 잠만 잘 테니 과감히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를 예약하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독일이고 베를린이란 큰 도시인데 숙박비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히 저렴한 곳을 발견했다. 최악의 숙소에 묵었다는 후기는 별로 남기고 싶지 않아 아무리 싸도 평점이나 조건은 꼭 살피는데 웬걸, 평점도 조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덜컥 예약하고 나서야 당연히 8인실이라 생각했던 도미토리가 16인실이었음을 발견했다. 도미토리가 16인실까지 있을 수 있는 건가? 내 상식선에선 아무리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여도 8인실이 최대 수치였는데... 어차피 며칠 뒤에 숙박 예정이라 무료 취소도 안 됐거니와 16인실 도미토리는 어떻게 생겨 먹었나 묘한 호기심도 생겨 그냥 묵기로 했다.

 16인실의 인상을 묘사하자면, '스토리 오브 베를린'이라는 베를린 역사 투어를 갔을 때 들른 지하 방공호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벽도 바닥도 회색빛 아스팔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무채색의 공간에 2층 침대 8대가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된 곳. 하필 또 2층에 배정을 받아 꾸역꾸역 침대에 올라 짐을 풀고 베를린 여행을 시작하였다. 

 친구는 이튿날 만날 예정이라 체크인을 하고 오후 일정이 텅텅 비었다. 일단 시내를 한 번 둘러보기로 하고 숙소 바로 옆 케밥집에서 대충 허기를 때운 후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도심 한복판에 삐죽빼죽 크기가 다른 정육면체가 촘촘히 심어져 있는 공간을 지났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란 곳이었다. 삐뚤빼뚤 솟은 정육면체 사이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을 따라 내려가니 홀로코스트에 관한 박물관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안타까움을 느끼고, 선대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겸허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데서 대단함을 느낌과 동시에 같은 가해자인 일본의 파렴치함을 떠올리니 약간의 분노도 느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는 이런 여러 감정을 넘는 기시감을 느꼈다. 아픈 역사를 달래는 추상의 공간 위에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포개졌기 때문이다. 메모리얼 정육면체 위에 걸터앉아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자료 속에 혼이 빠져나간 듯한 주검 같던 피해자들의 모습. 알 수 없는 균형이 깨진 듯한, 그런 데서 오는 기시감이었다.




 16인실 숙소는 복작거렸다. 어차피 다음날 친구를 만나면 다시 명소를 둘러볼 예정이라 더 빨빨대고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애써 가라앉힌 마음을 몰라주고 몇 마디 대화만으로 마음이 통한 네다섯 명의 무리가 통성명하자마자 저녁에 술을 마시러 나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온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느낀 기시감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왠지 밤을 차분히 보내고 싶어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을 했다. 넷, 넷, 셋, 몇몇 무리가 더 방을 오고 간 후에 16인실에 남아 있던 사람은 나와 1시 방향으로 내려다보이는 1층 침대에서 오래도록 책을 읽고 있던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화장실을 가려고 2층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저도 모르게 쿵, 하고 큰 소리를 냈다. 책을 읽는 그녀를 방해하기 싫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려온다는 게 그만 침대 사다리 끝을 헛디뎌 사다리 중간에서 뛰어내리다 소란을 피운 것이다. 머쓱하게 건네는 사과로 처음 말을 텄다. 그게 계기가 됐는지 화장실을 다녀오는 날 다시 본 그 친구가 먼저 통성명을 했다. 뻔한 통성명 후에 이어진 뻔한 대화. 베를린엔 며칠간 머무르냐, 어제오늘 베를린 어디 어디 다녀왔냐 등등. 자칫 뻔한 이야기만 풀어내다 지루해져 끊겨버릴 듯한 대화가 둘 모두 오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다녀왔다는 데에서 다시금 이어졌다. 베를린에 오기 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마주치는 세계대전의 흔적이 더 와닿는다는 그녀. 통성명 과정에서 밝힌 그녀의 전공이 역사여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같은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 보였다. 힐끔 훔쳐 본 시옷 자로 뒤집어 베개 옆에 놓아둔 책도 세계대전을 다룬 책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우연을 빌미로 대화를 이어갔다, 지만... 사실 그녀 말을 듣는 게 팔 할, 입을 뻐끔거린 게 이 할밖에 안 됐다. (짧아서 슬픈 영어 실력이여...) 그녀도 내가 느낀 기시감이랄까 불균형이랄까를 느꼈다는 부분에서 격한 맞장구를 쳤다. (그나마 스피킹보다 리스닝은 어느 정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시간 차가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었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데서 둘 모두 말이 참 잘 통한다고 느꼈는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내일 베를린을 떠나고, 모레가 생일이란 것까지 알게 되었다. 술 마시러 나간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도미토리 출입문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올 즈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아침, 중앙역에 친구 마중도 할겸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이른 아침 여명을 맞으며 로비로 내려오다 계단 끝에 있는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게 말이 잘 통하던 친구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라도 남겨 주고 싶단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 생일은 아직 하루가 남았지만, 오늘 체크아웃한다 했으니 지금이 아니면 영영 축하할 기회가 없으리라. 마침 주머니에 있던 2유로짜리 동전을 넣고 초코바 하나를 뽑아 방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전날 샀던 엽서 한 장을 꺼내 'happy birthday to you'를 적어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초코바와 함께 머리맡에 두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그녀 이름이 뭐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낯선 여행지의 16인실 도미토리에서, 시끌벅적한 다른 이들과 달리 유일하게 여행의 감상을 고스란히 공유할 수 있던 존재에 고마움을 느꼈나보다. 그녀도 아마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같은 감상을 공유한 누군가가 고마움에 대한 표시로 생일을 축하해줬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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