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마흔여덟

by 목연





학창 시절, 학교에선 달리기 기록을 쟀다. 수행평가의 하나이기도 했고 체력 검사의 하나이기도 했던 기록. 나는 언제나 뒤에서 일등이었고 선생님은 내게 최선을 다한 거냐고 물었다. 출발선에 서서 시작을 기다릴 때면 가슴이 떨렸다. “시작!” 소리와 함께 뛰쳐나가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늘 1초 뒤에 출발했다. 내가 걸음을 뗄 때 아이들은 이미 멀리 가 있었고 나는 ‘이번에도 망했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저 멀리 간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뛰는 일은, 내가 느리다는 걸 깨닫게 했지만 좌절감을 주진 않았다. 나는 스스로 느린 사람임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까칠했던 때수건 시절이 지났을 때, 내 안의 승부욕과 함께 열정도 식었다. 한때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인터넷에 검색을 해서라도 따라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느 날 뒤돌아보니 침대와 한 몸이 된 내가 있었다.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침과 마지못해 펴는 책, 또 마지못해 했던 야자. 공부를 하기 싫은데 자꾸만 공부하라는 어른들과 눈치 보며 책을 뒤적이던 그때. 하루 24시간 중 내 시간이라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달리기가 하고 싶었다. 야자를 하다가 텅 빈 운동장을 보면 그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생각으로만 달렸고 몸은 교실에 붙어 있었다.


스물 둘, 대학교 삼학년이 되었을 때 내 안의 열정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스물, 스물하나를 이도저도 아니게 보냈는데 벌써 삼학년이라니. 충격이었고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들었다. 선생님은 내게 게으름이 문제라 했고 나 역시 그걸 알았기에 부끄러웠다. 함께 시를 쓰던 친구들이 여전히 시를 쓸 때, 나는 끄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 군대를 다녀온 14선배들의 복학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내게 14선배들은 레전드(전설이라 쓰면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들 것 같다.)처럼 느껴졌는데, 소문에 의하면 과제를 대학원생 수준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학년 때부터 열심히 했고 잘했다. 나와 함께 다니는 친구는 내게 그렇게 말했고, 일학년도 이학년도 아닌 삼학년인 내가 문득 부끄러웠다. 선배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과제하는 방식을 배웠고 전공에 대한 지식도 함께 얻었다. 선배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대개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내숭을 떨 때, 선배들은 ‘나 공부 많이 했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지식을 나누어줬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때문에 나는 선배들과 선생님,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여섯 개의 전공 수업과 창작 수업은 내게 꽤 큰 스트레스를 줬지만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과제를 하는 게 즐거웠고 뿌듯했다.


스물넷이 되었을 때 나는 휴학을 선택했고 선배들은 이듬해에 졸업했다. 휴학을 하자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엔 내 시간이 없어 괴로웠는데, 휴학을 하니 온통 내 시간뿐이라 괴로웠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 때마다 불안해졌다. 무언가를 해도 한 것 같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회의가 들었다.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돈을 벌기 위해 가장 먼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다행히 아르바이트는 금방 구해졌고 나는 그곳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엔 집으로 와 글을 썼다. 강제력이 없으면 게을러지는 나를 알기에, 나는 미리 글쓰기 프로그램을 여러 개 신청해둔 상태였다. 처음 한 달은 뿌듯했으나 마음속엔 불안이 피어올랐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남들처럼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달리고 싶었고 몸을 쓰고 싶었다. 나는 언니에게 “복싱을 배워 볼까?” 물었고 언니는 “그것도 나쁘지 않지.” 했다. 그렇게 여덟 달을 보낸 후, 아르바이트를 그만 뒀다. 회사는 아르바이트생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달리고 싶었다. 내가 무언가를 오롯이 해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면 누군가 명치를 누르는 듯 답답했다. 그 답답함을 지우기 위해 몸을 썼다. 몸을 쓰면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아침마다 걷고 또 걸었다. 최근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언니와 달리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걷다가 문득 뛰고 싶을 때, “시작!”이라는 말없이 뛰었다. 언니는 내게 눈짓을 했고 그럼 우리는 달렸다. 기록과 시작에 대한 긴장이 없으니 달리는 게 재밌었다. 배가 당기고 숨이 차도 참을 만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온 몸이 무거워져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조금만 더 참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비를 넘기고 우리가 정한 도착점에 다다르면 기분이 좋았다. 마스크 속 뜨거운 입김이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말,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음을 쓰고 몸을 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잊지 않아야 할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