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기억, 여든까지 간다

1일 1행복 실천기

by 목연





봄의 절정인 5월은 여러모로 따뜻한 달(月)이다.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바람과 따뜻한 햇살, 녹색으로 물든 가로수. 산책로엔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고 사람들은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불어오는 따뜻함을 즐긴다. 따뜻해진 기온만큼이나 5월은 마음이 가장 따뜻해지는 달이기도 하다. 가정의 달인 5월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다.

나와 언니가 어릴 때, 엄마는 예의를 중요시했다. 엄마는 우리와 함께 식당에 갈 때면, “식당에선 우리만 밥을 먹는 게 아니니 절대 뛰면 안 된다.”고 말했다. 친구와 약속이 있을 때면 “적어도 약속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가야 한다.”고 말했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올 때면 “내 책이 아니니 더욱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언니와 나는 엄마의 말을 대체로 잘 들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인데, 나와 언니가 친구와 함께 등교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친구는 등교 시간보다 일찍 집으로 왔다. 나와 언니는 서랍에서 원하는 양말을 고르다 다퉜고, 그 사이 친구는 벨을 여러 번 눌렀다. 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언니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미뤘고, 언니는 내게 문을 열라고 미뤘다. 그 사이 엄마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친구에게 학교에 먼저 가라고 말했다. 각자 원하는 양말을 찾지 못한 채 서로에게 성질을 내던 우리를 보며 엄마는 “둘 다 서랍에서 손 안 떼!” 하고 외쳤다. 엄마는 아주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친구가 왔으면 문을 열어줘야지, 양말을 찾고 있어!” 했다. 그 날 나와 언니는 오랜 시간 혼났고, 퉁퉁 부은 눈으로 등교 시간을 지나 교실 문을 열었다. 이 날 외에도 엄마는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단호하게 혼냈고, 잘못을 지적했다. 엄마의 말은 곧 엄마의 태도였기에, 우리 역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남을 기다리게 하기 보단 내가 기다리는 걸 자처했고, 공공장소에선 뛰지 않았다. 빌려 본 책은 깨끗하게 읽고 반납했고, 어른들을 보면 먼저 인사했다. 엄마의 훈육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심어주었지만 의문을 남길 때도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지금은 오른손 엄지손톱만 뜯는다). 엄마는 내 버릇을 고치기 위해 봉숭아물도 들이고 바르면 쓴 맛이 나는 매니큐어를 사오기도 했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손톱을 뜯던 어느 날, 엄마는 공구함에서 펜치를 꺼냈다. 그러고선 내 손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엄마는 펜치로 내 손을 집었고 나는 울며 거세게 저항했다. 내가 저항하면 할수록 엄마는 더 세게 내 손을 잡았다. 엄마는 거세게 저항하는 나를 보며 “한 번만 더 손톱을 뜯으면 손톱 다 뽑을 줄 알아.” 라고 말했다. 어린 내게 엄마의 말은 귀신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물론 내 손톱은 펜치에 뽑히지 않은 채 잘 자랐지만, 가끔씩 그때를 떠올리면 그 날의 공포가 떠올랐다. 성인이 된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그 날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때 진짜 내 손톱 뽑으려고 한 거야?” 내 물음에 엄마는 “내가 그랬나?” 라며 멋쩍게 웃었다. 엄마의 말에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너희 외할매가 별나잖아. 내가 안 그러려고 했는데, 엄마도 외할매 밑에서 자랐으니까.”

위로 오빠가 둘인 엄마는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았고, 살림을 시켰다. 남들처럼 공부를 하고 싶던 엄마는 외할머니를 졸라 학원에 다니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외할머니 때문에 좌절됐다.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엄마는 외할머니 곁에서 음식을 배웠고, 함께 시장에 나갔다. 뒤끝은 없으나 불 같은 성격을 가진 외할머니는 자주 엄마에게 화를 냈고, 엄마가 울며 대체 왜 그러느냐고 따졌지만 더 큰 화가 돌아왔다. 외할머니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절대 저렇게는 안 키워야지 하고 다짐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우리와 함께 웃고 떠들다가도 흘리듯 말하곤 했다. “나는 너희 나이 되면 공부하고 싶다.”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면 나는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 말이 엄마에게 얼마나 와 닿지 않고 책임감 없는 말로 들렸을까, 싶었다. 사랑에, 일에, 그 어느 것에 나이가 중요하냐는 말은 어쩌면 한 살이라도 젊은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신도 우리를 애지중지 키우고 싶었는데 한 번씩 자신도 모르는 화가 속에서 치밀었다며. 그럴 때면 겁난 우리 보다 자신의 화가 먼저 보였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의 이야기는 늘 머쓱한 웃음으로 끝났고, 나는 더 이상 그 날의 기억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15..jpg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 감성으로 그린 그림 :)


언젠가 수업에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노인이 되려면 건강한 청년이 되어야 하고, 건강한 청년이 되려면 건강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단지 ‘어린 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가 행복해야 어른도 행복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어린 날의 기억과 습관은 평생을 좌우한다. 그렇기에 어린이는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약자를 향한 혐오가 짙어지는 세상에서 어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를 잊지 않고 돌보는 것이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린 나를 잊지 않아야 어른이 된 나를 돌볼 수 있고, 아직 어린 존재들을 보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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