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행복 실천기
아빠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네 시 삼십 분, 알람이 울리면 아빠는 투박한 손으로 알람을 끈다. 그 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며 스트레칭을 한다. 아빠는 숨소리가 거칠어질 즈음 스트레칭을 마치고 욕실로 향한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보일러를 켜는 우리와 달리 아빠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찬물로 세수와 양치를 한다. 세면대를 사용하는 우리와 달리 아빠는 욕실 의자에 앉아 코를 흥흥 푼다. 아빠의 세수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엄마는 미리 안쳐둔 밥을 밥솥에서 푼다. 그러는 사이 아빠는 스킨과 로션을 소리 나게 찹찹, 바른다. 잠에서 깬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아빠는 밥과 국을 순식간에 비워낸다.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는 “천천히 좀 먹으라니까.” 라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한다. 혈압이 높은 아빠는 약을 먹고 영양제도 먹는다. 다섯 시 삼십 분, 아빠는 집을 나서 일터로 향한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상경한 아빠는 택시기사부터 광부(광부일은 강원도에서 했다)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일찍이 학업에서 손을 놓았기에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쓰는 것뿐이었다. 온종일 택시를 몰아 힘겹게 번 돈은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향했고, 아빠는 가끔 고향집을 찾았다. 아직 어린 아빠가 고향에 갈 때면 할아버지는 술값을 내놓으라 했다. 슈퍼에 달아놓은 외상이 많다며, 외상값을 갚는 김에 술도 한 병 받아오라는 말과 함께.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가 미웠지만 자신의 아빠였기에, 뜻을 거스르기보단 따르는 쪽을 택했다. 아빠는 꽤 오래 그런 생활을 했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술과 담배를 찾았다. 서울에서 일을 구하고 생계를 이어나가던 아빠는 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고향과 가까운 대구로 내려왔다. 대구에서 아빠는 자신의 동생과 함께 팀을 꾸려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현재까지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한때는 노가다로 불렸고 지금 역시 노가다로 불리는 일을 말이다. 아빠와 차를 타고 대구 시내를 돌 때면, 아빠는 손가락으로 아파트를 가리켰다. “저거 아빠가 지은 거다. 십 년도 더 된 아파튼데.” “저쪽에 크레인 보이재? 아빠 현장 저기 있다.” 아빠는 손가락으로 아파트 이곳저곳을 가리켰고, 나는 아빠가 지은 아파트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신기했다. 저렇게나 높고 큰 아파트를 사람이 짓고, 아빠가 짓는다는 게. 어릴 땐 그러한 사실이 더욱 신기했고 자랑스러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내게 아빠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아빠가 짓는다는 건 신기하고도 신나는 일이었다.
학년이 바뀌고 새 학기가 되면 학교에선 종이를 한 장 주었다. 학생의 가정환경을 조사하기 위함이라는 명목 하에 건네진 종이엔 부모님의 이름과 나이, 직업, 최종 학력을 기입해야 했다. 어린 나는 집으로 가 엄마에게 종이를 내밀었고 그럼 엄마는 엄마의 이름과 아빠의 이름, 나이를 적었다. 엄마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옆에 전업주부라 적었고, 아빠의 이름과 나이 옆엔 일용직 노동자(노가다)라고 적었다. 열심히 적은 것에 비해 선생님은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간혹 나를 불러 힘든 건 없냐고 묻는 선생님도 계셨다. 나는 선생님이 묻는 힘듦의 뜻을 몰랐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번의 새 학년, 새 학기를 보내고 고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선생님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향해 “너희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할래?” 물었다. 그럼 아이들은 “아니요.” 대답했다. 남자애들은 수학 문제를 풀다 “완전 노가다네, 이거.” 했고, 고등학교 때 만난 수학 선생님 역시 “노가다로 풀어야 해.” 했다. 사람들은 일이 힘들고 대체로 수고스러울 때, 또 잘 풀리지 않을 때 ‘노가다’라는 말을 썼다. 노가다라는 일 자체가 몸을 쓰는 일이고 힘든 일이니 어쩌면 당연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으나, 노가다 하는 아빠를 둔 나로서 그 말을 듣는 건 썩 좋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아빠가 노가다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 말을 쉽게 뱉었겠지만, 아빠가 하는 일이 노가다였기에 그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또 그 말엔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었는데, 가령 아빠가 노가다를 한다고 하면 나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나 우리 집을 가난하게 보는 시선이 그랬다. 나는 점차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 들었고 짜증이 났다. 오해가 빚어낸 짜증은 아빠에게로 향했고, 노가다 하는 아빠가 미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아빠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내게 아빠의 직업을 물을 때면 “그냥 일하셔.” 라고 대답할 뿐,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노가다라는 말 속에 든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었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방패삼아 노가다 하는 아빠에 대한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었다. 노가다 하는 아빠에 대한 부끄러움을 속이기에 타인의 시선만큼 좋은 건 없었다. 나는 자주 타인의 시선을 핑계 삼아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초저녁부터 자는 아빠가 보였다. 긴 베개를 다리 사이에 낀 채 코를 고는. 벽 너머로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듣는 밤이면 아빠에게 미안해졌다. “이거 완전 노가다야.” 라고 말하는 사람과 노가다 하는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내가 겹쳐보였다.
아빠는 요즘 스스로를 건설노동자라 부른다. 몇 해 전 노가다가 아닌 건설노동자라는 정식 명칭이 생겼다며, 휴대폰 케이스 앞에 꽂힌 카드를 보여줬다. 거기엔 정말 아빠의 사진과 주민번호, 건설노동자라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아빠는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겼다. 건설현장에서만 삼십 년 가까이 보냈기에, 옛 기술을 모두 할 수 있다며, 덕분에 나이가 든 지금도 일할 수 있다며 기뻐한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볼 때면 아빠를 부끄러워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생계유지와 가족을 위해 택한 일이지만 자신의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매일 새벽 일어나 현장으로 향했고, 열심히 일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건 아빠가 아니라 나였다.
건설현장과 건설노동자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은 노가다, 노가다 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속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고생하는 삶을 살게 돼.’ 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삶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다는 것을. 아빠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끼지 않았고, 그것이 단지 몸이었을 뿐이다. 한때 나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방패삼아 아빠를 부끄러워했고 아빠의 직업을 숨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인이 된 지금, 주변 사람들은 아빠의 직업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의 이야기를 하다 직업에 관련된 주제가 나올 때면 굳이 숨기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아빠의 직업이 부끄럽지 않다.
아빠는 오늘도 새벽 일찍 집을 나선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시멘트와 흙이 묻은 조끼를 손에 들고 곧장 욕실로 가 작업복을 벗는다. 오늘 하루 고생한 아빠에게 나는 안부를 묻는다. 잘 다녀오셨냐고, 낮에 기온이 꽤 올랐는데 덥진 않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