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행복 실천기
사람들이 좋아하는 계절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따뜻한 봄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코끝이 시린 겨울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당장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여름을 즐기고 누군가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낀다. 5월의 중순을 향해 달려가는 요즘,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차가운 날이 계속 된다. 봄이라기엔 덥고 여름이라기엔 시원한 날들. 봄과 여름 사이에 낀 계절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어릴 때의 나는 숨기고 싶은 게 많았다. 두 팔 가득 난 털을 가리고 싶었고, 친구들보다 뚱뚱한 내 몸을 숨기고 싶었다. 양쪽 팔뚝의 모공각화증을 가리고 싶었고, 얼굴 가득 자리한 주근깨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숨기고자 하는 것들은 숨겨지거나 가려지지 않았다. 뚱뚱한 몸을 가리기 위해 큰 옷을 입으면 몸이 더 커보였고, 두툼한 외투를 걸치면 몸이 더 두툼해보였다. 주근깨를 가리기 위해 바른 엄마의 화장품은 허옇게 떴고, 손톱으로 긁어낸 모공각화증은 검붉은 딱지를 남겼다. 그것들을 숨기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달리 그것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이러한 나의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피부와 몸을 드러내야 하는 여름보단 겨울이 좋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봄보단 익숙한 것이 지속되는 가을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가리고자 하는 걸 가장 먼저 발견했고 물어봤다. 그럴 때면 나는 얼굴을 붉혔고 말없이 웃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짝꿍이 된 남자애는 내 팔에 난 털을 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너는 팔에 털이 왜 이렇게 많아?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걔는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내 팔을 만졌고 털을 뽑는 시늉을 했다. 걔에겐 장난이자 호기심이었을 행동이 내게는 큰 부끄러움과 상처로 남았다. 그 날 이후 나는 팔에 난 털을 가리기 급급했고, 어느 날엔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로 털을 깎기도 했다. 하지만 털을 며칠이 지나면 다시 자랐고, 원래의 털과 달리 빳빳하고 따가웠다. 나는 털을 깎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또 털을 깎았고, 그렇게 몇 년의 여름을 보냈다.
두 팔 가득 난 털과 팔뚝에 자리한 모공각화증 딱지, 점처럼 짙은 주근깨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초등학교에서와 달리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 팔에 난 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따금씩 모공각화증에 대해 묻긴 했지만 호기심보단 조심스러움이 앞선 모습이었다. 친구들은 여드름이 나지 않은 나를 보며 피부가 좋다며 부러워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을 뿐인데, 달라진 거라곤 방학 동안 살을 15kg 쯤 뺀 것뿐인데,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고도 놀라거나 놀리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 덕분에 나는 여름이 되어도 더 이상 털을 깎지 않았다. 모공각화증을 가리기 위해 팔뚝을 덮는 반팔을 입지도 않았고, 거울에 비친 주근깨를 보고도 더 이상 밉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나를 받아들였고, 내 몸을 받아들였다. 내가 가진 것을 받아들이자 그것들이 거슬리지 않았고, 차츰 봄과 여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제의 내가 가을을 좋아했다면 오늘의 나는 봄을 좋아한다. 어린 날의 내가 겨울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자연스럽게 겨울을 좋아하고 여름도 좋아한다. 계절이 모두 다르듯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모습을 지닌다. 누군가 밝은 피부를 가졌다면 누군가는 어둡거나 붉은 피부를 가졌을 수도 있다.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듯,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 같은 복숭아를 먹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계절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하지만 봄과 봄 사이에도 계절은 있고, 여름과 가을 사이에도 계절은 있다(그렇기에 계절은 매일 매일 다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나누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뉘지만, 그것을 쪼개고 또 쪼개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다. 문득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