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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연 Feb 08. 2020

다섯 형제의 엄마, 쁘니의 이야기

고양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담벼락에 앉아 따스한 햇빛을 즐기는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지곤 한다. 우리 집 마당과 옥상을 뛰어다니는 아홉 마리의 고양이(다섯 형제와 쩨째의 아가들)들이야 어린 시절을 함께 했기에 그 모습을 알지만, 처음 보는 고양이들의 어린 시절은 본 적이 없으므로.  




다섯 형제(은비, 또랑, 쩨째, 달래, 둥이)의 엄마이자 애교 많고 똑똑한 쁘니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처음 보는 낯선 고양이는 사료를 붓는 나와 엄마를 향해 야옹 하고 울었다. 엄마는 그런 쁘니에게 말을 걸었고 쁘니는 도망가지 않았다. 쁘니 이전에 우리 집을 다녀간 고양이(깅깅이와 상배)의 부재로 마음이 헛헛하던 차에 만난 쁘니는 행복 그 자체였고 존재만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 나와 엄마를 보면 담벼락에 누워 애교를 부리던 쁘니는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엄마는 그런 쁘니를 내치지 않았다. 우리는 쁘니에게 공간을 주었고 쁘니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다. 쁘니가 우리 집에 드나든지 한 달쯤 되던 날, 일주일 정도 쁘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엄마는 쁘니에게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며 매일 쁘니를 불렀지만 쁘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쁘니가 돌아온지 한 달 쯤 지났을까, 쁘니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에게 쁘니의 배를 가리키며 "임신한 거 아닐까?" 했고 엄마 역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임신 기간이 짧은 만큼 배는 빨리 불러왔고 엄마와 나는 쁘니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우리에게 네 마리에서 다섯 마리 정도를 출산할 것 같다고 했고 초산은 아닌 것 같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병원에 다녀온 날, 나와 엄마는 쁘니가 자주 가는 장소에 산실을 만들어 주었고 쁘니 역시 출산할 장소를 찾는 듯했다.




출산을 앞두고 잠이 많아진 쁘니




2019년 3월 9일, 저녁. 진통이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첫째가 태어났다. 30분 후 둘째가 태어났고 약 1시간 간격으로 네 마리의 새끼가 태어났다(막내의 경우엔 조금 늦게 태어나 자정을 넘긴 3월 10일 새벽에 태어났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처음 본 나는 경이로움이나 황홀함 보다는 신기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꼬물거리는 새끼들 보단 지쳐 잠든 쁘니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두 눈을 감고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쁘니를 보자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쁘니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 쁘니가 어릴 땐 얼마나 더 예뻤을까, 쁘니는 언제 엄마와 헤어져 독립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쁘니는 새끼를 돌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출산 후 잠든 쁘니와 아가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다섯 마리를 쁘니 혼자 돌보는 건 꽤 큰 체력 소모를 요하는 일이었다. 쁘니는 다 커서도 젖을 물려는 아가들을 매몰차게 떼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쁘니의 배엔 늘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 덩치만한 새끼가 젖을 물려하자 쁘니는 하악질을 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쁘니가 아가들을 독립시키려 했던 게, 혹은 제가 이 집을 떠나겠다 마음먹은 게. 두 가지 선택 중 쁘니는 후자를 선택했고 우리가 만났던 가을에 집을 떠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쁘니가 보이지 않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의 마음처럼 쁘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와 엄마는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이별 역시 갑작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별하는 순간은 늘 처음이기에 쁘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쁘니가 떠난 후에도 자주 쁘니를 불렀다. 다섯 형제들에게 간식을 주다가도 괜히 쁘니를 불렀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도 쁘니를 불렀다. 쁘니야, 하고 부르면 멀리서도 뛰어오던 쁘니였기에. 혹시나 제 이름을 들으면 우리를 다시 찾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쁘니는 뛰어오지 않았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쁘니를 마지막으로 본 날




옥상을 뛰어다니는 다섯 형제들을 보면 쁘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게 된다. 쁘니도 어렸을 땐 저렇게 뛰어다녔겠지, 엄마의 젖을 빨며 잠들었겠지 생각하며. 그럴 때면 괜히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쁘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한없이 미안하고 슬퍼진다.





쁘니야, 하고 부르면 멀리서도 뛰어오던 나의 고양이

엄마와 언니에게 행복한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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