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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연 Feb 17. 2020

쩨째는 사고뭉치

고양이를 통해 배우는 부모의 마음





고양이와 함께 살다 보면 부모의 마음을 약간은 알게 되는 것 같다고, 언젠가 생각한 적 있다. 쁘니가 다섯 형제를 낳았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이 갑자기 아팠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의 중성화 수술비를 벌기 위해 여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도 그랬다. 많은 나날 중 내가 정말 이 아이들을 가족처럼, 자식처럼 생각하는구나 느낀 건 아가들이 아플 때이다. 그건 아가들이 어릴 때도 그랬고 곧 성묘가 되는 지금도 그렇다. 아가들을 통해 느끼는 기쁨에서도 부모의 마음을 배우지만 아이들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 그럴 때 나는 한없이 미안함 마음을 느끼곤 한다.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쩨째는 누구보다 호기심 많고 두려움 없는 고양이다. 그렇기에 쩨째를 떠올리면 혹은 쩨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과 함께 긴 한숨이 나오곤 한다.




<사건 1>

때는 쩨째가 태어난 지 두 달쯤 되던 날. 여느 때처럼 나는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쁘니와 다섯 형제들은 집 안 곳곳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녔다. 나는 그런 아가들을 향해 장난감을 던져주었다. 장난감 안에 든 방울이 딸랑, 소리를 냄과 동시에 거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거실로 향했을 때, 바닥에 납작 엎드린 쩨째와 그런 쩨째의 머리 위로 쓰러진 접이식 식탁이 보였다. 나는 놀랄 새도 없이 상을 치웠다.  쩨째는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빙빙 돌며 소리를 질렀다(그때 알았다, 동물도 아프면 사람처럼 비명을 지른다는 것을. 그리고 후회했다. 왜 진작 상을 치우지 않아 이런 사태를 만든 것인지).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는 쩨째의 소리에 곧장 달려왔고 빨래 더미 어딘가에 놓여 있던 베개 커버에 쩨째를 싸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겨우 오전 9시를 넘긴 시간이라 의사는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은 나를 향해 동물 응급실을 가르쳐주었고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의사는 쩨째를 보더니 일단 사진을 찍어봐야 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쩨째를 입원실로 데려갔다. 약 한 시간이 흐르고 동기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학교에 오지 않는 것이냐고. 나는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고 의사가 나와 엄마를 불렀다. 다행히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고 살짝 금이 간 상태라고, 의사는 말했다. 길게 잡아 한 달 정도 깁스를 하면 뼈가 붙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의사의 말에 나와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탁이 쓰러질 때 하필이면 쩨째의 목 위로 쓰러졌기에, 혹시 쩨째가 평생 장애묘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입원실에 있는 쩨째를 한 번 보겠냐고 물었고 나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실엔 쩨째 만한 크기의 고양이와 강아지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쩨째는 조금 안정된 모습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의사는 오후 다섯 시쯤 오면 퇴원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붕대 감은 첫날, 쩨째는 붕대가 싫다
한바탕 뛰어놀고선 힘빠진 쩨째, 달래&은비와 함께 잠든 모습



집으로 온 쩨째는 제 몸의 절반 가까이를 감싸고 있는 붕대가 불편한지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다. 엄마는 그런 쩨째가 안쓰러워 품에 안으려 했지만 쩨째는 그것도 불편한 듯 자꾸만 어딘가로 향했다. 쁘니는 그런 제 새끼 곁에 앉아 쩨째를 핥아주었다. 하루 정도가 지나자 붕대에 익숙해진 듯, 쩨째는 형제들과 함께 집 안을 마구 돌아다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접이식 식탁을 비롯한 벽에 세워 놓은 모든 것들을 바닥에 엎어두었다. 같은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이 다치는 건 너무 마음 아픈 일이니까.


그로부터 2주 뒤, 쩨째는 붕대를 풀었다. 의사는 아직 어린 고양이라 뼈가 빨리 붙었다고 말했다. 내심 걱정했었는데 완전하게 붙은 뼈 사진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여전히 가슴 한 편에 남아 있었다.



붕대로부터의 해방!



쩨째가 다친 후 나와 엄마는 벽에 세워 둔 모든 것들을 치웠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들도 모두 치웠고 책상에 세워둔 모니터도 엎어 두었다. 귀찮음은 손 한 번만 더 움직이면 되지만 다치는 건 돌이킬 수 없으므로. 우리의 행동으로 고양이가 다쳤을 때 겪어야 할 아픔은 고양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므로.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볼 때 느껴지는 미안함과 죄책감 역시 너무나 무거우니까. 나와 엄마는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물건을 하나씩 엎었다.



(사고뭉치 쩨째의 에피소드는 2편에서 이어집니다)



사실 사고뭉치는 쩨째 아닌 나

사람이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많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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