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 폈다

열다섯

by 목연





계절이 변하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 사람들의 옷차림일까, 고양이 털이 빠지는 속도일까. 혹은 추운 계절을 지나는 동안 잠시 색을 묻고 살던 식물에서 피어나는 분홍빛일까.


우리 집은 주택가의 어느 골목 한 가운데 있다. 우리 집이 있는 골목은 꽤 긴데, 그 길이가 지루하지 않게 곳곳에 나무와 꽃들이 자란다. 대체로 집집마다 감나무와 매실 나무가 자라고 여름이면 담벼락에 장미가 활짝 핀다. 며칠 전, 아침 산책을 가는 길에 분홍빛으로 피어난 꽃을 봤다. 벚꽃을 닮았지만 벚꽃은 아닌, 연한 분홍빛의 작은 꽃. 나는 아빠에게 저 나무가 무엇이냐 물었고 아빠는 매실 나무라고 했다. 매실 나무. 거기엔 나의 추억이 꽤 서려 있다.


어릴 적 나는 요일 마다 드라마를 챙겨 보는 아이였다. 사극을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여인천하를 비롯한 많은 드라마를 봤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일지매'다. 거기에서 중요하게 나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매화였다. 어릴 적 나는 드라마를 보며 '매화'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꼈고 '매화'를 떠올리며 드라마의 한 장면을 곱씹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운 것은 매화에 대한 로망이 컸던 나머지 매화와 매실 나무가 같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내게 매화가 낭만적인 것이라면 매실 나무는 조금 달랐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매실을 딸 때가 되면 외할머니 댁에 가 매실을 땄다. 그때마다 나는 벌레와 사투하며 힘겹게 매실을 땄는데, 그 매실 나무에서 피는 꽃이 매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것이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의 아닌 기표를 사랑했던 것도 같다. 매화, 라고 말할 때의 분위기와 드라마 속 안타까웠던 그 사랑을 말이다. 다행히 충격은 얼마 가지 않았고 매화를 떠올리든 매실 나무를 떠올리든 그것을 가까이 생각하게 되었다. 벚꽃을 닮았고 나를 충격에 빠뜨린 그 꽃을 말이다.


고양이의 털이 빠지고 나의 옷이 가벼워지는 만큼, 나무들 역시 조용하지만 빠르게, 계절의 변화를 준비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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