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이어진다. 매일 같은 시간 알람이 울리고, 어제와 같은 반찬을 먹는다. 점심 즈음이 되면 허기를 느끼고 오후가 되면 졸음이 밀려온다. 저녁이 여유로운 날엔 소중한 이와의 약속 혹은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야 한다.
여섯 살 즈음,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숙제를 받았다. 주말 동안 있었던 일을 그림일기로 써오기, 그것이 숙제였다.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을 앉혀 놓고 다음 주까지 그림일기를 그려오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엄마에게 그림일기를 그려야 한다고 했고 엄마는 학교 근처 문구사에 가 그림일기장을 사왔다. 일기장을 펼치자 서너 문장이면 꽉 찰 것 같은 글씨 칸과 그림으로 채워 넣어야 할 큰 여백이 보였다. 누구도 내게 일기 쓰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림과 글씨를 가득 채워 선생님께 제출했다. 선생님은 나의 일기에 코멘트를 달아주셨고 나는 그것이 기뻐 더욱 열심히 일기를 썼다. 나의 일기 역사는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중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나의 일기를 더 이상 선생님이 검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썼던 일기가 대외적인 것, 숙제의 성격을 가졌다면 그 이후의 일기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다. 나는 매년 문구사에 가 두꺼운 스프링 노트를 샀다.
나의 일기는 매번 비슷했다. 폭식증과 외모에 대한 강박, 진로에 대한 고민이 짙었던 중학생 때엔 다이어트와 하고 싶은 일이 대한 고민이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47kg과 한예종, 그것이 내 중학교 시절 일기에 대한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이따금씩 다른 내용을 적기도 했다. 언니와 다툰 날이면 언니에 대한 욕을 한 가득 적었고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그 친구에 대한 내 감정과 나를 바라보는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을 예측해 적기도 했다. 대개 나의 사랑은 짝사랑이었지만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하루를 회상하는 일은 행복했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일기를 쓰다보면 하루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선 일기를 쓰지 않았는데, 매일 반복되는 나의 하루와 일기가 지겨워서였다(정확히는 행동하지 않는 나와 게으름에 대해 신물이 나서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나의 하루도 그래야 하는데, 내 하루는 늘 비슷했다. 매번 드는 생각도 어제와 같았고 한 달 전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지루함을 느꼈다. 또 나라는 사람에게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 이틀, 일기를 쓰지 않다보니 일주일이 되었고, 그 일주일이 쌓여 한 달이, 계절이, 일 년이 되었다. 나는 학업과 입시를 핑계 대며 일기 쓰는 것을, 내 하루를 기록하는 것을 멀리했다.
스물을 지나 스물 셋이 되었을 때, 불안이 찾아왔다. 취업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계속 되던 날이었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이어지던 때였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일기를 썼고 내 하루를 기록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오늘 한 일과 감정, 기분은 어땠으며 날씨는 어땠는지에 대해 적었다. 오랜만에 일기를 다시 쓰려니 낯선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삼일 쯤 되자 일기를 쓰지 않는 게 더 어색했다. 예전과 달리 일기장을 쓰는 게 재밌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생각이 많고 잡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때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걱정만 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라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는 기분이랄까. 무작정 누워 걱정만 하는 대신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느낌이 좋았다. 하나 둘 쌓여가는 일기는 오늘의 나에게 힘을 줬다. 지겹다고만 생각했던 십대 때의 일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왜 이렇게까지 몸무게와 외모에 집착했을까, 대체 그 애의 어디가 좋았던 걸까 생각하게 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고 변한 것들도 알 수 있었다. 나를 혹독하게 미워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때론 지루하고 심심하며, 십 년 전의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는 하루 속에서도 나는 다르고 내 주변도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기에, 비슷함이 주는 지루함과 심심함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힘을 빼되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 하자고, 그 하루를 기록하며 내일을 기다리고 실천하자고. 이것이 요즘 나의 목표이자 오래도록 가졌으면 하는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