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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현 Sep 21. 2023

모자 _ 나의 모자는 어디에?

에세이 (1)

평소처럼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다. 오래된 집이라 덜그럭거린다. 언제 또 이사해야 할지 모르니 이사할 당시 그대로 살다가 나온다. 그러니 몇 년을 살아도 내 집 같은 느낌이 적다. 버스와 차들이 도로를 메우기 시작할 때쯤이면 자동차 경적 소리와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또 하루가 될까? 아니면 새로운 하루가 될까? 그건 나에게 달렸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에 따라 좌우된다. 그 결정이 무대에서 펼쳐지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습관으로 몸에도 배어야 한다. 


큰 사거리가 보이는 도심지 아파트는 늘 소리와 전쟁한다. 때로는 정겹게 들리기도 하는데, 사람이 그립거나 일상의 풍경이 그림처럼 보일 때다. 그걸 자주 경험할수록 삶을 지탱하는 힘이 커질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잔잔히 밀려올 것이다. 모든 걸 하모니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모자 쓴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 둘이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횡단보도에서 신호 대기 중인 사람. 모두가 모자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데, 모자를 쓰지 않은 아이들은 엄마의 모자를 쓰려고 손을 뻗어 뛰어오른다. 아이를 달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는 엄마도 보인다.  


모자 하나 없는 난 별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모자 없이 외출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염려되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모자를 썼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나를 외계인 보듯 하지 않았다. 개인을 존중한다는 느낌이랄까.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걸 모르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공기가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다 궁금해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께 사람들이 왜 모자를 쓰냐고 물어 봤다. 품위와 여유가 묻어나는 할아버지는 그간 신문을 통해 알려진 모자의 의미에 대해 침착하고 느긋하게 말해 주었다.    


모자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고 했다. 모자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행위라며 일종의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모자의 색깔이 핵심인데, 파란색은 ‘나 오늘 컨디션 좋아. 열정과 여유도 있어.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해.’ 노란색은 ‘나 오늘 위로가 필요해. 하루쯤은 격려만 해줘.’ 초록색은 ‘미안해. 나 너랑 화해하고 싶어. 잘 지내고 싶어.’ 빨간색은 ‘나 요즘 힘들어. 무기력하고 우울하기까지 해. 내 표정과 행동에 오해하지 말아줘.’ 분홍색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응원 부탁해. 금방 일어날거야.’ 보라색은 ‘함께 밥 먹고, 차 마시며 대화하고 싶어.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너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처음 듣고 있을 땐, 이해되지 않았고, 의아하기까지 했다. 내 마음이 들킨다고 생각하니 감추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사람 관계가 어느 정도 감춰야 그나마 원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무표정에서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할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여셨다. 말투와 억양, 목소리 톤이 조금 전과 달랐다.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함과 따뜻한 온기와 진심, 사랑 냄새가 맡아졌다. 나를 압도하는 힘은 한낱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온 걸까?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마음을 숨기며 살아왔다고 했다. 마음을 숨기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어느 유명한 연기자(최민수)가 연기를 희망하는 아들에게 “연기를 하지 않는 게 연기”라고 말했다며, 오히려 현실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결코 자연스러운 건 아니라고 했다. 공감은 되지만, 의문이 들었다. 사회 어디서나 또한 친구 관계나 가정에서조차 마음을 오픈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자고 했다. 이미 모자를 쓰자는 캠페인의 목적을 뛰어넘어 더 발전되고 성숙한 모습을 소유한 거장의 품위였다. 이미 통달한 자의 눈빛과 견고하고 단단한 자세가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해 생각 해보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숨기려 연기를 했고, 그에 따르는 통증이 여기저기서 발생해서인지 이제는 모자를 쓰자고 하는데, 그 의도에 공감을 하되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거였다. 그건 정직과 진실에 관한 거였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이랬다. “그러니까 마음을 숨기는 연기는 정직과 진실과 만날 수 없다네. 평행선이야. 마음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내가 얻고 싶은 바를 얻기 위해 적당히 왜곡하거나 거짓을 첨가해야 하니까. 체면과 명예, 욕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를 숨겨야 덕스러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일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 하물며 가족도 속인다네. 인생에서 목적지만큼 중요한 게 과정일세.” 


“이 캠페인 끝자락에는 정직과 진실이 있다고 믿어. 거기까지 가야 하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네. 모자는 그냥 캠페인이야. 모자 자체에 능력이 있는 건 아니야. 모자를 쓰는 반복적인 행위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도구여야 하네. 나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온유하게 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모자를 착용하고 살아가는 일상으 경험에서 깨달아져야 하네. 그게 아니라면 매일 모자를 쓴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 행위 역시 형식일 뿐이지. 형식을 철저히 주의하게. 내가 살아보니 형식은 그 순간뿐이야. 형식은 세상의 역사일 뿐이야. 아무리 형식을 높인다 해도 그 가치는 인간의 눈높이일 뿐이지.” 


“이제 대화를 정리해볼까 하네. 연기를 하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쓰는 거라네. 먼저, 인생에서 연기가 바르지 않다는 걸 고민해야 할걸세. 80년을 살아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모자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모든 방법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적실성을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지금은 모자가 최선인 것 같아. 더 좋은 다른 방법이 있으면 그것도 해 보지 뭐. 너무 여유로운가. 그리고 자네가 모자를 쓴다면 그 행위 자체에 면죄부를 주지 말게. 모자를 착용하는 의도과 방향을 잊지 말아야 해. 모자는 정직과 진실로 가게 하는 하나의 대안이야.”


 “고민하는 건 참 좋은 거야. 자네, 연기자로 살지 말게. 지난날 연기자로 살아온 걸 후회한다네. 그 안에 정직과 진실을 담아보려 했지만, 그것 역시 연기에 불과했어. 숨길 수가 없어. 그리고 중요한 건 모자를 쓰다가 나중에는 벗는 단계까지 가야 해. 정직과 성실이 몸과 마음에 배이면 그때 모자를 벗는 거야. 내가 정직하고 진실하니까 모자를 더 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는 거야.”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할아버지와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모자를 쓰지 않으셨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고, 정직과 진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우선,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빼내기 위해 모자를 써보려 한다. 마음을 숨기지 않고 살기 위해 정직과 진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배우려 한다. 정직하고 진실하면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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