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빈칸이 많다, 다행일까
중고등학교 시험 기간이면 달력을 새로 만들었다. 공책 종이를 찢어 가로로 두 번, 세로로 두 번 접는다. 빈 칸에 날짜를 적으면 2~3주짜리 시험 달력 완성.
시험 범위에 나올 문제 유형을 외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한 눈에 보고 싶었고, 시험 시간표에 맞춰 공부해야 하는 과목은 무엇인지 적고 싶었다. 완성된 시험 달력은 책상 위 벽지로.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덕분에 적은 대로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다.
오늘은 10월 18일. 여분 달력의 10, 11, 12월 종이를 찟어 스테이플러로 엮었다. 세 달치 달력 위에 새로 시작한 일, 날짜가 정해진 일을 적었다. 남은 3개월, 동시에 굴러가는 일이 많다. 적다 보면 안심이 된다. 흘러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 잊어버린 채 구멍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가라 앉는다. 물론 아주 조금.
조급한 마음도 든다. 어느 하나에 너무 집중하면 나머지 것들을 놓칠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꿈틀거린다. 언제부터 이런 한 발 앞선 걱정이 일상화됐는지 모를 일이다.
발 끝의 불안함을 잠재우고,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고 싶다. 어디에 어느만큼 시간과 노력을 써서 일을 완성할 수 있을지, 어느만큼 에너지를 분배해야 조화롭게 남은 세 달을 보낼 수 있을지 정하고 싶다. 정하면, 그대로 될 것 마냥.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게 인생임을 알면서도. 내가 어그러트리거나, 남이 어그러트리거나. 어찌됐건.
빈틈없이 계획으로 채우고 싶은 욕망과 그 절실함의 덧없음이 함께 한다. 덕분에 아직 달력은 빈칸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