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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Jan 11. 2019

공익용 희생제물의 마약, 선거뽕

#월간퇴사_후_2년_아직_잘살고_있습니다(7) 구프가 남긴 것 (상)

구프를 회고할 수 있다니 놀랍다.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에서 어느새 추억이 됐나 보다. 구프는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의 준말이다. 2018년 지방선거, 정치와 인연 없는 시민들이 각자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무소속 구의원으로 출마하자는 프로젝트다.


구프 덕에 선거뽕 중독으로 꽤나 고생했다. 선거뽕이란 무엇이냐, 예비후보 등록 후 본격 선거운동을 하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공익을 위해 활활 불에 통째로 타오르는 재물이 되고 싶었다. 기꺼이. 피닉스처럼 살아올라 내가 사는 동네에서 무언가를 바꾸고 싶었다. 지지라는 마법의 물약 덕에 선거뽕이 차올랐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프 참여 제안을 받은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월간퇴사> 독립출판 시장조사를 위해 마포구 한 서점에 들렀다. 서점 주인에게 독립출판 책 추천을 요청한 계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겨털살롱'을 준비 중이던 나에게 그는 재미있다며 웃었다. 자신이 준비 중인 프로젝트도 설명했다. 민주시민으로서 선거 권리를 포기할 순 없지만, 도저히 찍은 후보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찍을 수밖에 없던 선거. 특히 누구를 얼마나 뽑는지 매번 헷갈리는 지방선거. 이 선거에 구의원 후보로 직접 나가보자-


유권자의 출마.
한국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1인, 나의 출마.


나에겐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출마자는 정치인 가족 및 지인이나 성공한 사람(하버드대 졸업, 사업 성공, 고시 패스 등)만 하는 거라고 무의식 중에 정해놓은 나에게는.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출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왜 몰랐을까. 현실 속 정치인, 다수당의 인원 구성을 보면 대다수 유권자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 겨울, 프로젝트의 컨셉을 아모르 정치로, 공식 sns와 홍보 영상, 선언문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프로젝트지만, 기존 정당인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프로젝트 시작 자체가 정당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었고, 기존과 다른 후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정당인이 들어오면 그 지점이 흐려진다고 생각했다. 제안자와 나 모두 이탈리아 오성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개인적으론 이 프로젝트가 한국판 오성운동의 준비작업처럼 남길 바랐다.


‘개시 파티’를 열어 공식 오픈을 알렸고, 이후 일요일 두 시마다 모임을 연다고 sns에 알렸다. 출마 결심 후 홍보용 SNS의 섬네일로 광화문 사진을 택했다. 2016년 겨울, 혹은 2017년 봄 촛불로 뒤덮인 광화문 광경. 출마 이유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난 이미지였다. 그 사진 위에 '대통령도 끌어내렸는데 내 동네라고 못 바꿀쏘냐'라고 적었다.


(당시 프로젝트 제안자 인터뷰 형식으로 만든 홍보 영상)



2016년~2017년 광화문 촛불집회는 나에게 특별했다. 아마 우리 모두에게 그럴 것이다. 권력을 사유화한 '적폐 정권'에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했다. 이 시대 사람들이 공유한 역사적 경험이 생활정치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 기대했다. 실험해보고 싶었다. 일상을 둘러싼 관습에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한 시민이라면, 바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도 이전과 다른 투표 양태를 보이지 않을까? 누가 가장 그 문제 해결에 적합한지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을까?


프로젝트 일요 스터디 모임은 여러 재능기부자들 덕에 충실한 시간으로 이어졌다.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퇴사하고 만든 스타트업 폴리시브릿지, 정치를 주제로 놀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벤처 칠리펀트, 마포구 전 구의원 오진아(정의당)님 등이 주말마다 필수 정보를 알려줬다.


▲ 일 잘하는 구의원은 구청장의 역할도 할 수 있다. 전대 구청장이 졸속으로 가결한 지하 주차장 사업건을 철회하는 일, 유휴공간을 어린이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 노는 땅을 찾아 텃밭으로 만드는 일을 구의원이 시작할 수 있다. 무소속이나 진보정당 소속 소수 구의원은 캐스팅보트 역할도 가능하다.


▲ 공약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스스로의 삶과 출마한 지역을 분석하고, 지역의 현안이나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면 공약을 만들 수 있다.


▲ 무소속 구의원 후보인 우리들은 주민의 추천 서명을 최소 50개 받아야 한다. 서명은 후보 등록 직전인 5월 중, 단 5일 동안만 받을 수 있다.


▲ 선거 운동을 하려면 3월부터 예비 후보 등록 후 가능하다. 이때 40만 원을 출마 지역구 선관위 계좌에 입금해야 한다. 나머지 기탁금 160만 원은 5월 후보등록 기간인 이틀(24, 25일) 안에 납부해야 후보로서 끝까지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다.


무소속 구의원 출마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구의회 관계자도 만났다. 정당 공천 없이 구의원 당선되기 불가능한 현실에서, 정당 소속 구의원 후보는 공천권을 가진 지역위원장(대부분은 그 지역 국회의원)의 을이 된다. 자연스럽게 위계 구조가 형성되며 구의원은 구정보단 국회의원의 '몸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선 여러 번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관련 기사: 전직 도(道) 의원의 고백 "나는 국회의원 몸종이었다").


출마 전까지 나 역시 몰랐다. 구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우리는 그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지, 일 잘하는 구의원보다 공천권자 말 잘 듣는 구의원 뽑을 가능성이 왜 높은지. 왜 정당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의도 정치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지.


프로젝트는 매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온라인에서의 응원은 엄청났다. 우리를 취재한 언론사 중 가장 기억 남는 곳은 닷페이스(https://dotface.kr/)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상식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며 밀레니얼 세대가 모인 미디어 스타트업. 형식의 새로움, 진중하지만 새로운 관점을 무기로 여러 성과를 만들어낸 곳이다. 닷페이스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다니. 프로젝트의 성공을 보증하는 것 같았다.

 

닷페이스의 구성원과 보유 시청자 그리고 당시 구프 팀원 대부분  ‘밀레니얼'로 묶일 요즘 젊은것들이다. 젊은 층의 정당 선호도는 낮기 때문에 우리 편으로 만들기 상대적으로 쉬운 층이기도 하다. 좋은 궁합이 좋은 파장을 만들어내리라 기대했다. 닷페이스의 인터뷰 취재에는 총 네 명이 참석했다. 프로젝트 제안자와 나, 기록자로 참여하려다 결국 출마하게 된 전직 기자, 룸메이트 친구를 사무장으로 선임한 현직 학원 선생님. 제안자와 나와 작년 말부터 카톡으로 프로젝트 콘셉트를 고민하고 설명회를 준비하던 현직 회사원은 오지 못했다. 아마도 야근이 주말까지 이어졌으리라.


(닷페이스 인터뷰 영상)


닷페이스 영상에 대한 온라인 반응은 엄청났다. 지금까지 다른 언론사 인터뷰와 차원이 달랐다. 응원의 댓글이 이어졌다. 개인적인 응원도 많이 받았다. 특히 페북에서 지지를 많이 받았다. 든든했다. 정말 내가 내 동네를 바꿀 수 있으리란 용기가 뽐뿌질 됐다. 그 용기에 힘입어 선거 운동에 나섰고, 정책 공약을 만들었다. 고민의 주제, 생각의 범위가 넓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쓰는 돈의 단위도 커졌다. 선거사무실을 임대했다. 스터디 초반인 1월만 해도 선거 사무실에 코웃음 쳤다. 나조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구의원 선거 사무실, 대체 누가 들어온다고 사무실을 번화가에 임대해야 하나.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선거 사무실은 누군가를 응대하는 장소라기보다, 선거 현수막을 걸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었다. 선거법상 선거 현수막은 선거 사무 건물에만 걸 수 있었다. 현수막을 제외하고 가장 확실한 홍보수단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현수막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공보물도 디자이너에게 의뢰를 맡겨 제작했다. 역시 1월만 해도 공보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하게, 꼭 넣어야 하는 내용만 넣으려 했다. 그동안 선거에서 공보물 때문에 당락이 나뉜 후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 의견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지지와 응원의 소리가 커지면서, 공보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귀에 꽂혔다. 마음이 바뀌었다. 작은 거 하나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 제대로의 기준은 기존의 것을 포함하되 거기다 내 개성을 포기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기존 기준을 따르는 것도 힘에 붙였다. 그나마 지인을 통해 저렴하게 디자인을 맡겼지만, 그 금액도 모자라서 펀드에 투자해달라고 페북으로 sos를 쳤다.


조금이라도 더 지지받기 위해
 내가 할 수는 일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다 돈이 다 떨어져도, 선거 끝나고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다시 말 하지만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선거뽕에 차 있던 시기다.


예비 후보 기간이 끝나고 13일 선거기간 동안 한 일 중 지금 생각했을 때 가장 어이없는 건 사무실 현수막의 위치를 바꾼 것. 앞면 현수막을 옆면으로, 옆면 현수막을 앞면으로. 두 장의 차이는 문구와 포즈. 크게 다르진 않았다.


현수막 교체가 유권자들에게 더 좋은 인상을 주리라는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물론 조언 당사자는 진심으로 얘기했고, 당시 나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였지만. 가격 대비, 그리고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지금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다.


선거뽕은 선거 끝나고 바로 빠지지 않았다. 낙선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 선거 사무장을 집으로 초대했다. 선거 기간 마을 신문을 퇴사하고 사무장으로 함께 한 동갑내기 동네 친구 솜이었다. 내 방 베란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그렸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유리창에 마카펜으로 브레인스토밍 작업을 했다.


얼마 후에는 솜에게 펀드 투자자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면 기획안을 가져갔다. 동네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추워서 긴 옷을 입었다. 선거가 6월, 추운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카페 2층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숨이 찼다.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솜은 내 계획에 대해 너무 큰 이야기를 한다고 조언했다. 계획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라는 조언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매일매일 그런 때를 상상했다.


매일매일 골골대며 새 일을 기획했다. 솜과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겠다고, 출판사까지 만나러 다녔다. 한 시간 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손에 땀이 차고 입이 말랐다. 나오는데 쓰러질 것 같았다. 나 지금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괜찮겠거니 넘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미쳤구나 싶다. 당시 내가 할 일은 휴식과 선거 뒷정리였다. 선거일이 지났다고 선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일단 선거기간 쓴 자금 내역을 선관위에 보고해야 한다. 일명 선거 회계 보고.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영수증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기한을 넘기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회계 책임자였기 때문에 남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그다음 정리할 일은 선거 펀드였다.


구의원은 법적으로 선거 후원금을 받지 못한다. 대신 펀드는 만들 수 있다. 내 선거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은 내가 돈을 벌어다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한 푼, 두 푼 대부분 소액 후원했다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응원의 의미였다. 선거 펀드 뒤처리라 함은 원리금 상환 금액을 준비하는 것부터 돈과 함께 투자자들이 보낸 응원의 마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막막해졌다. 응원과 지지를 잊지 않고 동네에서 계속 활동하리라 계획했던 생각들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내 방 유리창에 솜과 함께 적은 빅픽처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당장은 돈이 제일 중요해 보였다. 원리금 상환일은 3개월 남았지만 당장 수중에 남는 돈이 얼마인지 파악해야 했다. 향후 활동 계획과 활동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일상은 또 어떻게 꾸릴지 고민이 한가득이었다. 현실 도피만 하고 싶었다.


외면하면 사라질 것 같았다.
무거운 고민도, 응원도.


지지받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나처럼 부끄러움과 자책감 심한 인간의 성격을 바꾼다. 공익용 희생물로 스스로를 자처하게 만드는 연대의 힘이다. 내가 좀 더 큰 그릇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구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좋았을 텐데. 6개월 지난 지금 판단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되었다.


선거는 돈 문제에 초월할 정도로 돈에 걱정이 없거나, 자기 삶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가야 하는 거였다. 그러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응원과 지지 위에서 잠시 동안 그런 척할 수 있었다. 거품이 흐트러지고 나면 원래 나로 돌아온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했다. 현실 판단을 제대로 하고, 나 자신을 다시 세우고, 그리고 사회에 보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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