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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Jan 11. 2019

시간을 돌린다면 운영팀을 만드리

월간퇴사 후 2년, 아직 잘 살고 있습니다 (8) 구프가 남긴 것(중)

Photo by Magda Ehlers from Pexels


구프를 통한 출마자는 4명이다. 프로젝트 초기부터 언론에 보도된 출마자 숫자에서 많이 줄었다. 불출마 대상과 이유는 다양하다. 프로젝트 제안자와 초기 멤버 하나 그리고 프로젝트 설명회와 스터디 참석했던 열 명 정도의 사람들 모두 출마하지 않았다.


기탁금이 부담스러워, 선거 기간 동안 필요한 생활비가 부족해서, 출마 시기에 회사 일이 바빠져서, 일과 동시에 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등등 여러 상황 탓이 있었다. 마을 주민자치회의에 나가서 노인 참석자들에게 심한 면박을 당한 후 연락이 두절된 참석자도 있었다. 하지만 불출마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인연이 끊어진 사람도 있다. 바로 프로젝트 제안자다.  

 

구프를 통해 얻은 교훈은 개인이 특정 프로젝트나 가치를 상징하게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그 개인에게 좋지 않다. 개인의 마음과 상황은 언제고 달라질 수 있고, 개인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물론 책임감 있는 개인이라면 최대한 버틸 것이다. 버티다 버티다 못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공유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물론 그가 혼자 버티기 전에, 책임을 함께 짊어지고 프로젝트를 이끌 팀이 생기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구프는 그러지 못했다. 제안자와 함께 프로젝트 오픈 전부터 회의하고 고민하던 초기 멤버가 있지만, 우리는 운영팀을 조직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기 모임이 중단됐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상징인 제안자를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그가 아무런 설명 없이 출마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치챈 사람도, 말릴 사람도 없었다.


1월부터 이어진 매주 일요일 스터디 모임은 봄이 될 즈음 중단됐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선거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시너지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안자는 sns을 이용한 선거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명함 돌리기에 성실하게 나선 다른 출마자들의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기존 정당 후보 방식과 차이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에 나서본 입장에선 내 개성을 크게 저해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게 맞았다.


나라고 왜 sns을 이용한 선거 운동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인스타와 페북으로 인연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나에게 표를 줄 유권자, 금천구 시흥1동과 4동에 사는 사람을 온라인으로 만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sns에서 나는, 내 관심사 버블 속 사람들과 더 잘 연결됐다. 하지만 내가 나간 선거는 가장 작은 지역 단위인 구의원이었다.


sns을 활용한 선거운동 아이디어 중 선거법상 안 된다는 것도 있었다. 페북 콘텐츠로 광고를 하는 것은 물론, sns에 ‘어디 후보가 어느 카페에서 일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동네 유권자는 찾아가시라'는 게시글을 올리는 것도 불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선거 운동은 페북에 하루 하나 의미 있는 글 올리기, 인스타에 지역명 키워드 팔로우하고 우리 동네 이용자들 찾기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런 나와 달리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구프 초기 그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쌓은 신뢰가 그때까지도 잘 작동했다. 그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때는 공보물 박스를 나르는 날이었다.


힘 빠진 팔다리가 등줄기에 흐르는 땀처럼 축축 쳐졌다. 4페이지 책자 천장을 담은 박스 몇십 개를 옮긴 탓이다. 박스 안에는 동사무소와 선관위에 제출할 선거 공보물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공보물 디자인과 제작비를 합치면, 선거에 참여한 이후 두 번째로 많은 돈을 들린 항목이었다. 박스를 선거사무실 문 앞에 늘어놨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여기가 2층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운송 기사님과 선거 사무장 솜이 함께 도와줘서 어찌나 다행인지. 사무실 바닥에 깔아 둔 요가매트에 뻗어 생각했다.


구프 출마자에 대한 온라인에서의 지지,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동네 주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나에게 필요한 도움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선거에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선거일 6월 13일을 이십여 일 앞둔 시기가 돼서야 깨달았다. 실제 발로 함께 뛰고, 물건을 나를 동료가 필요하다. 뒤늦게라도 동네 친구 솜이 사무장으로,  퇴사까지 하고 와준 게 그나마 얼마나 천운인지.


온라인에선 난 혼자가 아니었다. 먼저 구프 출마로 인연을 맺은 자매들이 있다. 일요 스터디 모임은 중단됐지만 우리끼리 단톡 방을 만들어서 하루하루 선거 운동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나누며 위로했다. 특히 뒤늦게 참여한 언니 한 분은 활기가 사라진 프로젝트를 다시 불태우려고 개인적으로 홍보 전문가를 찾아 의견도 구하고, 어린이날 단체로 선거운동하는 방법도 고민해 제안했다. 


문득 제안자가 떠올랐다. 이상했다. 그가 왜 조용하지? 아무리 sns으로 선거운동을 해도, 이젠 실제 후보 등록하고, 공보물 박스 나르며 프로젝트 관계자 모두가 모인 단톡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시기인데...


요가 매트 위의 몸을 일으켰다. 자매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선거 후보 등록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안자 00님은 왜 단톡방에 아무런 말이 없을까요? 3월 예비후보 등록 설명회 때처럼 관련 포스팅이나 뭔가가 올라오지 않는 게 이상해요. 설마 출마 프로젝트 제안자가 출마를 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심정적으로 출마를 결심한 날을 기억한다. 프로젝트 참여 제안은 여름에 받았지만, 확신은 겨울에 들었다. 망설임이 길었다. 초기 기획을 위해 제안자와 또 다른 초기 멤버와 밥을 먹고, 카톡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도 내가 출마를 하는 게 맞나 싶었다.


퇴사 후 원칙에 따르면 이 일을 해야 했다. 하고 싶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인 데다 공익적인 일이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프로젝트 기록자로 참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 월간퇴사 출판과 내년 겨털살롱 준비 등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 보였다.


한 발만 걸치며 제안자와 간간히 연락하고 지내다 보니 겨울이 다가왔다. 월간퇴사 2호 시험 인쇄본을 갖고 충무로 인쇄소에서 돌아오는 날, 프로젝트 제안자와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근황과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 그는 구프에 너무 올인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간 너무 지치게 되니. 여력이 되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하자고 말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그 말은 당시 나에게 화두였다. 그즈음 나는 ‘퇴사론'을 마무리한 덕분에, 회사에서 나의 태도를 회고할 수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은 무조건, 어떻게든 다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영리하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채 항상 긴장 상태에 깔려 있던 나.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균형추로 적합해 보였다.


‘할 수 있는 만큼 일 하자'는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무조건 맡은 일을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해야 한다'는 말보다 어렵다. 내가 투여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큼 가능한지, 현재 내 상황에서 어떤 일에 어떤 정도로 일해야 할지 가늠할 때 가능한 말이다. ‘무조건,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경우' 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경우, 주변과 어떻게 협력할지도 염두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할 수 있는 만큼’ 일하다가,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런 경우 왜 더 이상 할 수 없는지를 솔직히 털어놓고, 이해와 조율을 구해야 한다. 그게 함께 일한 사람과 지지해준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날의 티타임 덕분에 나는 프로젝트 제안자를 신뢰하게 됐다. 그와 내가 잘 맞는 성향은 아닐지언정, 일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공통적으로 염두하고 있다는 게 안심이었다. 그가 오히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당신의 모든 걸 올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부담감에 도망쳤으리라.


그해 겨울부터 다음 해 봄까지 그에 대한 신뢰는 이어졌다. 4월 합동 출마 선언에 함께 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견 역시 그저 스타일의 차이라고만 이해했다. 한 번도 그가 출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구프라는 사건을 내 인생에 던진 제안자. 그와의 인연은 그해 봄에 멈춰 있다. 대신 몇 개월 후 그를 기사에서 만났다. 당시 민주당 대표로 이해찬 의원이 선출되자, 젊은 정치인이 고사하는 한국 정치 비판 기사가 나왔다. 그 속에서 그는 구프 제안자로서 한 마디 멘트를 던졌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에게 의사 표명 없이 불출마한 출마프로젝트 제안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혁신 프로젝트 및 아이디어 제안자는 최초의 미친 자다. 그 미친 소리에 귀 기울여 의미를 더하는 두 번째, 세 번째 합류자들 덕에 프로젝트는 발전한다. 이미 출마자들이 나름의 활동으로 구프의 의미를 널리 알렸기 때문에 제안자가 빠진다고,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지녔다. 함께 만든 프로젝트의 상징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 혹은 사회 전반적으로 활용되는 게 공평하다. 하지만 이 일을 가이드할 운영팀은 없었다.


운영팀이 있다면 또 어떤 일을 했을까. 구프 초기인 2018년 초, 2등까지 구의원을 뽑는 동네를 줄이고 합쳐서, 4등까지(다양성을 위해) 구의원을 뽑는 동네를 만들자는 시민사회&정치권의 요구에 목소리를 같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4인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글을 썼다 https://brunch.co.kr/@kshee/93 하지만 구프 차원에서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그런 역할을 할 운영팀이 없었으니까!)


이밖에 구프가 일회성이 아닌 장기 프로젝트로서 갈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하고, 2018년 활동의 기록을 어떻게 잘 정리해서 미래에 활용할지 정했으리라. 마지막으로,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한국판 오성운동의 씨앗으로서 구프가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도 논의하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더 큰 가능성이 많았을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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