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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Jan 11. 2019

외계인의 길냥이 돌봄기

#월간퇴사 후 2년, 아직 잘 살고 있습니다 (10)

선거 펀드 원리금을 일부 갖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여유가 생겼다. 몇 개월 만에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쓴 5만 원 덕에 5백만 원어치 소비의 기쁨을 느꼈다.  공익을 위한 희생 제물에서 생각 많고 고민 많고 감상적인 곽승희로 되돌아와 주변을 보니 어느새 추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곧 겨울이 오리란 생각에 겁이 났다. 길냥이들 때문이다.


작년 집 근처 공원에 길냥이 겨울 집을 만들어 설치했는데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혹시 누가 욕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길냥이는 국가에서 보호하는 동물로, 위해를 끼칠 경우 법적으로 처벌받는다. 그런 동물을 보호하는데 왜 두려울까. 길냥이 돌보미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여러 범죄 기사들, 고양이 관련 카페에 올라온 여러 피해 이야기들 때문이다. 올해는 꼭 다른 사람들과 겨울 집을 만들어서 공동 운영하자 다짐했다. 고양이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 대부분은 인간 파트너가 없다. 먹이를 구하는데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의 상태는 쉽게 처참해진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태어난 새끼이거나, 엄마 잃은 새끼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포도'가 그런 경우였다.


머리털을 부여잡고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수정하기 위해 집 근처 카페로 가던 중, 아파트 입구 근처 풀숲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경비 초소 근무자와 미화 노동자였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하수 구멍에 빠져서 건졌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한 손바닥에 올라올 크기의 점박이 고양이가 혼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얼굴에는 검은색 먼지 같은 게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탄광에서 구르다 온 얼굴이었다. 누런 색 점액질 때문에 눈은 제대로 뜨지 못했다. 똥파리가 녀석의 등에 앉을 기회를 노렸다.


멀치감치 서서 지켜봤지만 어미는 오지 않았다. 근처에는 새하얀 털에 이마에만 검은 털이 몇 가닥 나이는 성묘가 자기 새끼를 데리고 우릴 경계했다. 다른 점박이 고양이는 없었다. 근처 쓰레기 분리수거대에서 깨끗한 플라스틱 과일각을 구했다. 장갑을 끼고 있던 경비 담당자분에게 고양이를 안아 각 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맨 손으로 새끼 고양이를 잡아 인간 냄새를 묻힐 경우, 나중에 올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경계할 수 있다.


동물병원에 녀석을 데리고 갔다. 걱정했던 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심한 감기 탓에 염증성 콧물과 눈물로 얼굴이 엉망아 되었던 것이다. 깨끗한 얼굴의 녀석은 무척 예뻤다. 플라스틱 과일각에 '청포도'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청포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약을 받아서 다시 풀숲으로 돌아왔다. 흙바닥으로 내려간 녀석은 나무 뒤에서 나를 경계하는 하얀 성묘와 작은 고양이를 향해 움직였다.


풀 숲 옆 초소의 경비 담당자 한 분이 나를 신기해했다. 길냥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다니. 걱정되면 데려가서 키우라고 했다. 녀석의 어미는 3주 전쯤 죽었다고. 풀숲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 근처였다. 거기서 점박이 성묘가 교통사고를 당해 묻어줬다고 했다. 녀석의 상태가 이해됐다. 한, 두 달 정도밖에 돼 보이는 새끼가 엄마 없이 추워지는 계절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 역시 녀석을 보호할 독립적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대신 매일 약과 밥을 챙겨줬다.  


포도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도 자리를 지켰다. 눈에 약 넣는 건 싫어했다. 발버둥 치는 몸을 붙잡을 때마다 볼록한 아랫배와 털의 부드러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길 위 생명이 산다는 것, 나와의 접촉에 반응한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안약 다음은 감기약이었다. 고깃국물에 약을 넣고 잘 저어 수저에 뜨면 포도가 다가왔다. 작은 얼굴을 갖다 대고 혀로 핥아갔다. 몇 번 먹고 고개를 돌리다가도, 다시 수저를 들이대면 입을 열었다. 그릇만 가져다 두면 다른 고양이들에게 치여 쫓겨났기에 계속 수저로 먹일 수밖에 없었다.


궁금했다. 포도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루 한 번 나타나 맛있는 음식을 주지만, 자기 얼굴을 붙잡아 눈에 이상한 액체를 넣는, 주변 고양이와는 다른 존재. 외계인에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포도에게 외계인일까?  


인간으로서의 나는 이 사회에 소속되고 증명된 존재다. 안전하다. 하지만 비인간 동물인 포도와 만나는 순간 세상은 뒤집힌다. 우리가 만난 그 순간 세상은 지붕 없는 집이다. 발 디디고 설 땅은 있지만 안전하지 않다. 매일매일 반갑고, 순간순간 두려웠다. 풀숲에 쭈그리고 앉아 감기약 섞은 고깃국물을 떠먹일 때마다 상상했다. 풀숲은 아파트 한 동과 바로 붙어 있다. 이대로 누군가 떨어뜨린 벽돌에 머리를 맞고 죽을 수도 있다. 실제 몇 년 전 그렇게 죽은 캣 파트너가 있다. 왜 길냥이의 밥을 주냐는 적대적인 주민과 만나는 일도 걱정스러웠다.


포도와 헤어지면 두려운 상상이 나를 점령했다. 포도는 내가 다가가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다. 캣 파트너로 위장한 사이코패스 인간에게 해코지당할 수 있다. 추위에 떨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다시 눈 뜨지 못하는 포도. 몇 주 째 낫지 않은 감기가 도져서 풀숲에 뻗어있는 포도.


가장 최악의 상상은 포도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포도를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 위치추적기를 붙인 것도 아니고, 어디서 잠을 자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밥을 먹이면서 나눈 인사가 작별인사일 수 있다. 왜 너를 만나서, 왜 너를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해서, 왜 너를 보호할 독립공간 하나 마련하지 못해서. 선거뽕이 사라진 자리에 자책감이 수북이 싸였다.


포도를 돌보며 묘한 감각을 느꼈다. 적당한 비유를 찾지 못했는데 가장 근접한 표현이 '길거리에서 고아를 보살피는 느낌'이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생명, 보호가 필요한 생명, 내가 거두는 게 제일인데 그럴 수 없는 생명. 길 위에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오늘 나눈 인사를 끝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수 있다.


총성도 총알도 없는 전쟁터에 선 것 같았다. 국가와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인간의 전쟁이 아닌 생명의 전쟁. 인간동물이 비인간 동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거나 학대해도 무방한 세상. 아마 이런 불안함을 수많은 길냥이 돌보미는 항상 느낄 것이다. 길냥이에게 해를 끼칠 대상자를 처벌하는 법 조항이 존재하지만, 법은 현실과 너무 멀다.  


그나마 내가 사는 동네에선 아직 길냥이 학대 사건이 일어난 적 없었다. 가끔씩 풀숲에 사료나 캔이 놓여있기도 했다. 포도뿐 아니라 그 영역 고양이를 돌보는 주민들이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공동육아를 하는 느낌이었다. 아주 가끔은 다른 캣 파트너를 만났다. 포도의 상태를 설명했지만 입양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임시 구조 후 입양을 보낼 이마저도 구하지 못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갔다. 이제 확실히 겨울에 들어섰다. 그날도 포도를 챙기러 내려가던 중간에 다른 고양이에게 잡혔다. 미오라는 녀석이었다. 포도 영역 인근 다른 풀숲에서 사람이 지나가면 '미오, 미오' 울며 먹을 걸 내놓으라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의 아침밥을 챙겨주는 캣 파트너를 만나 알게 된 이름이다.


미오에게 사료를 주는데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물 싫어하는 사람이면 어쩌지. 속은 긴장했지만 겉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고양이를 챙기는 캣 파트너로서 길냥이 이미지 향상을 위한 노력이었다.


미오네 풀숲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미오에게 몇 번 간식을 챙겨줬다고 했다. 저 아래 풀숲에 새끼 길냥이가 있는데 혹시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새끼 길냥이라는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는 어디 가고. 엄마는 교통사고로 죽었데요. 같이 가서 보실래요?

그렇게 포도와 새 가족의 인연이 시작됐다.


포도는 입양 직후 상태가 급속히 안 좋아졌다. 내가 데리고 갔던 병원 입원실에서 수액을 맞았다. 선천성 신장 질환이라고 했다. 입양자는 멘붕에 빠졌다. 구조한 길냥이가 하필이면 평생 환자라니. 상태가 좋지 않으면 치료비로 얼마가 들어갈지 모른다는 말에 나도 함께 멘붕에 빠졌다. 포도를 더 일찍 구조했다면...


며칠 후 입양자를 다시 만났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멘붕이 가라 앉은 마음에는 이미 포도와의 사랑이 차올라있었다. 하나님과 인간과 외계인의 사랑을 모두 받았던 포도는 지금 그 집에서 잘 살고 있다. 상태는 아주 조금씩 호전 중이다.


새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포도(photo by. 포도언니)
"으랏차냥~" (포도는 긴 귀 만큼 날씬한 다리가 참 이쁘다. 길쭉길쭉하 성묘로 자라날듯+_+)
나는 독립적인 개성을 지닌 고양이로소이다. 존중하고 보호해달라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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