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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Jan 11. 2019

사랑은 세상을 넓히고 바꾼다, 종을 초월해서

#월간퇴사 후 2년, 아직 잘 살고 있습니다 (11)

아이를 기르는 동년배 지인들은 힘든 만큼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은 그 생명이 보는 만큼의 세상을 선물 받는다. 그전엔 전혀 알지 못한 세상이다. 반려묘 웅미의 세상이 내 삶에 들어온 때는 첫 퇴사 후 자유와 불안 속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웅미는 직장 선배가 길에서 구조한 길냥이었다. 엄마 없이 홀로 도로가에 앉아,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 가만히 앉아있던 하얀 털 뭉치는 그중 수염 달린 사람의 어깨에 올라탔다. 졸지에 집사로 간택된 그는 이미 함께 살던 반려견 이름('웅순')의 글자를 하나 떼어 이름을 지었다. '웅미'는 건강한 고양이로 성장했고, 집사는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웅미의 임시보호처를 찾았다.


웅미가 새끼 길냥이이에서 성묘 집냥이로 성장한 당시, 나는 상암동 원룸에서 첫 퇴사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고양이를 돌본 경험은 없었다. 선배네 부부가 알려준 대로 밥을 챙겨주고, 물을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고, 웅미와 함께 잠을 잤다. 혼자 산지 3년 차, 비인간 동물과 동거는 어렵지 않았다.


임보 기간이 끝나자 나는 병에 걸렸다. 상사병. 고작 한 달 같이 살았을 뿐인데, 웅미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기 어색했다. 믿을 수 없었다. 밤마다 내 얼굴 옆에서 자던 하얀 고양이, 내 보라색 슬리퍼를 마구 씹어놓은 개구쟁이, 이마에 덮인 검은 털이 수북한데 정중앙만 하얀색으로 갈린 5:5 가르마, 머리를 쓰다듬으면 골골거리며 무릎이나 배위로 올라오던 웅미. 비인간 동물 반려자가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도 못 한 채, 사랑부터 빠져버렸다. 애끓는 마음에 매일매일 우울했다. 그때 웅미에겐 불행이고 나에겐 다행이지만, 뉴스가 들어왔다. 집안 사정 때문에 웅미의 새 입양처를 찾는다는 선배의 소식. 떨리는 마음으로 입양 문의를 보냈다.


입양 후 고양이 공부를 시작했다. 습성과 특성, 주의할 것과 책임져야 할 것을 구분했다. 세상 공부도 더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 원룸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동물 캐리어를 든 채 택시를 잡으면 네 번에 한 번만 성공한다는 것을, 사람에 의지하며 사는 고양이를 길바닥에 유기하는 인간도 많다는 것을.


웅미 덕에 돈이 생명만큼 소중하다는 말의 의미도 깨달았다. 웅미는 예전 집에서 물어뜯은 보라색 슬리퍼 조각을 몇 개월 후 뱉어냈다. 노란 토 웅덩이 속 변색된 고무를 보며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장 조각이 나온 줄 알고. 다행히 생명의 지장은 없지만 나머지 조각을 꺼내기 위해 개복수술에 들어갔다. 반려동물은 의료보험이 없다. 3일간 나간 돈이 150만 원에 가까웠다. 그만두고 싶던 직장을 다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옮길 곳이 생길 때까지 다니기로 했다.


웅미와 함께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다른 고양이에게도 눈길이 갔다. 세 번째 보금자리였던 신림동 원룸 골목에는 길냥이가 많았다. 어느 날 밤 유리창 뒤 쪽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후레쉬를 켜서 보니 담벼락 아래 새끼 5마리가 굴러다녔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빛에 어미 고양이가 하악 대며 경계했다. 저렇게 소리를 내며 집주인들이 가만 안 둘 텐데. 같은 세입자 처지에 신경이 쓰였다. 밥을 챙겨준지 이틀 만에 그들은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온라인 고양이 정보 공유 카페에 가면 세상에 불쌍한 고양이가 너무 많다. 이 불쌍한 고양이들을 챙겨주는 캣맘 중 등이 휠 정도로 힘든 사람도 많다. 캣맘들은 각자 혼자서 전쟁을 치루는 것처럼 고양이들을 돌봐갔다. 카페에 올라온 캣맘들의 고충 토로(고양이 밥 주다 쌍욕은 기본이요 폭행까지 당한, 기사화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와 각개전투하는 것처럼 길냥이를 돌보고 구조하고 중성화시키며 탈진해가는 캣맘들을 접했다. 혼자선 못할 짓이다. 이 분야야말로 강력한 커뮤니티가 필요했다. 길냥이 돌봄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독립생활을 접고 부모님 댁, 꼬꼬마 어린이 시절을 보낸 금천구로 이사갔다. 퇴사 후 길냥이 돌봄 활동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인터뷰 글 수정에 골몰하던 시기, 선거로 알고 지낸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평소 동물 반려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 하던 곽승희여, 국민해결2018 소셜리빙랩이란 행정부 공모 사업이 생겼으니 지원해보지 않겠나요?


정부가 정책을 만들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기존 방식과 반대로, 시민이 직접 대안을 찾아 실험해보는 취지의 사업이었다. 길냥이 더 나아가 반려 동물 간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려면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그 커뮤니티를 만들 좋은 기회라 여기고 지원했다. 진행 과정에서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무언가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중간관리 단체에게 받았고,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그리하여 '금동땡 알림함'을 제작했다. 1층은 고양이 급식소(급식소라고 널리 알리면 혹시 공격받고나 훼손될까봐 쉼터라고 이름 붙였다), 2층은 개 배변비닐함, 3층은 청소도구 보관함이자 게시판으로.


알림함을 만드는 과정 중 동네에서 동물을 통해 인연이 쌓인 지인들을 모두 초대했다. 온라인으로 홍보도 했지만 예상만큼 오진 않았다. 오프라인에서도 행사 설명지와 초대 선물을 들고 다니며 홍보했지만 오지 않았다. 선거 때 느꼈던 어려움을 다시 느꼈다. 알림함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커뮤니티가 생기길 바랐지만 실패했다.


바람만 한 건 아니었다. 민주주의 활동가 그룹 <빠띠>의 두 활동가와 행사 타임라인을 세세하게 짜고, 관련 회의를 하며 커뮤니티 조성 계획을 짰지만 반도 실천하지 못했다. 때는 바야흐로 2018년 가을과 겨울 사이. 인터뷰 글쓰기 스트레스로 밤마다 다이어리에 왼 편엔 수정안을, 오른쪽엔 '괴롭다, 괴롭다' 염불처럼 박아 넣던 때였다. 여기다 더해 동물 반려 커뮤니티 조성과 사업 진행자로 나서려니... 하루에 몇 시간 자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개인적인 사정에 더해 이상하게 디자인된 사업 운영 계획도 나를 빡치게 했다. 대체 행정안전부의 어느 분이 이 사업을 의도했길래, 사업비 결제를 사업진행자 대신 중간관리단체가 직접 카드를 들고 가도록 디자인했을까. 이를 위해 사업 결제 시기는 각 팀마다 달라야 했다. 체크카드 직접 결제 원칙 때문에 온라인 결제도 못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 무슨...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내가 이걸 왜 했을까를 하루에도 서너 번 떠올렸다. 고난의 시간을 지나 알림함은 결국 잘 만들어져 구청 뒤 공원에 설치됐다. 개똥 안 치우고 가는 반려인들 때문에 민원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었다. 1층 급식소를 이용하는 고양이는 한 마리만 확인했다.


사실 알림함은 실용적 이라기보단 상징적인 설치함이다.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길냥이와 강아지를 위한 정책에 관심가진 사람이 있음을 이 과정을 통해 알렸다. 더구나 운이 좋게도 관련 기관과 조율이 돼서 예상보다 길게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설치 기간 종료될 때까지 커뮤니티는 조성되지 않았다. 대신 중간 행사 때 참석했던, 고양이를 좋아하는 동네 주민 하나가 운영진 지원 연락을 보내왔다. 공모 사업을 진행하며 알게 된 금천구 캣맘협회 회원 분들과도 타이밍 좋게 인연이 닿았다. 이들과 함께 장기적인 운영 방안을 고민하기로 했다.   


나는 캣맘이라고 하긴 어렵다. 온라인 카페 속 수많은 캣맘처럼 정기적으로, 열정적으로 길냥이를 돌보지 않는다. (동네에 다른 캣맘이 있음을 알기에 안심하는 맘도 있다. 오늘 내가 못하면 그가 해주리 - 얼굴도 모르는 이와 공동육아하는 느낌 ㅎㅎ) 직접 통덫을 들고나가 고양이를 유인한 후 중성화 수술을 시키는 일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 내 상황에선 애달파할 여유도 없다. 그저 내 상황이 허락하는 데로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캣파트너일 뿐이다.


길냥이를 계속 돌보게 되면 개체 수를 파악하고, 중성화 수술에 시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심정적, 경제적 여력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예전엔 그런 사람만 길냥이를 돌봐야 하는 줄 알았다.


모든 걸 100% 책임지지 못한다면 아예 발도 붙이지 말아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100% 책임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데, 종이 다르고 사는 터전이 다른 비인간 동물과 인간동물 사이에는 어쩌겠나. 구조해서 중성화 수술할 자신 없다고 눈앞에 떠는 고양이를 그저 지나쳐야 할까. 그랬다면 포도는 이미 죽고 없다. 일단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한다.


게다가 내가 완벽한 캣맘이 된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불쌍한 고양이를 지킬 순 없다. 사람한테도 불친절한 헬조선, 길 위 생명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가 많기를 기대할 순 없다. 길냥이가 안전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홀로 캣맘 활동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인간 동물에게 친절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일단은 우리 동네부터.


금천 캣맘 협회 밴드 :

https://band.us/n/a0a4Y3S4BfR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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