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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Jan 11. 2019

겨털살롱

#월간퇴사_후_2년_아직_잘살고_있습니다 (6)

한 개인의 자각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나, 아무리 좋은 일도 혼자 파도를 일으킬 수 없다. 사람들이 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지 절. 실. 히. 깨달은 계기는 겨털살롱 덕분이었다. 겨털살롱은 2017년 여름 진행한 문화행사다. 겨털은 겨드랑이 털의 준말이다.


털은 나의 오랜 콤플렉스 덩어리이자 박멸의 대상이었다. 내 털을 없애고 싶은 욕망에 처음 눈 뜬 때는 중학교 1학년. 교복 치마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14살의 치마 교복은 낭만의 상징이지만, 나에겐 수치의 산물이었다. 무릎길이 교복 치마 아래 드러난 내 다리에는 기다랗고 빽빽한 털이 슝슝 달려있었다. 하얀 살결과 검은 털의 대조, 그 시각효과란. 바지만 주로 입고 다니던 13살의 내 세상이 끝난 뒤 새로운 지옥이 펼쳐졌다.


종아리와 무릎 털을 세상에서 멸종시키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다. 팔과 다리에 털 없는 여자를 아름답고 당연한 존재로, 그런 여자를 주인공처럼 받드는 세상을. 이런 털을 가진 내가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잘 성장할 수 있을까? 내 털은 끔찍한 미래를 상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는 나의 일부.


학교 정문을 지나 검은 구두에서 하얀 실내화로 갈아 신을 때,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하체를 구부려 신발을 벗을 때 자연히 다리가 일정 시간 드러났다. 내 다리를 보고 놀라지 않을까, 놀리지 않을까, 항상 두근거렸다. 동시에 다른 동급생들의 다리를 흘낏흘낏 쳐다봤다. 나만큼 심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내 다리를 보고 놀려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평범한 청소년의 다리에 관심 가질 이는 많지 않으니까. 가장 냉혹한 관찰자는 나 자신이었다. 수치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고민을 품고 자랐다. 여름이 싫었다. 맨 다리도 더운데 스타킹까지 신어야 하다니. 겨울은 좋았다. 다리털을 두꺼운 스타킹 속으로 흔적도 없이 감출 수 있었으니. 20대까지 나에게 털은 당면 과제이자, 해결 방법을 몰라 감추기 급급한 문제였다.


몸에 난 털에 대한 혐오는 겨드랑이까지 확대됐다. 성년이 된 후 어떤 옷을 입을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민소매만큼은 예외였다. 종아리만큼 겨드랑이도 털이 많았다. 질감도 억셌다. 면도기로 밀어도 항상 거뭇거뭇해보였다. (내 눈이라 더 잘 띄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돈을 벌어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기로 선택했다.


몇 번의 온라인 검색을 통해 신촌의 한 피부과를 방문했다. 광고 문구와 달리 영구 제모는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털의 양은 훨씬 줄어든다고. 세 번 시술 후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전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 그마저도 면도기로 충분히 제거 가능했다. 이제 여름은 예쁜 민소매를 입는 계절이 됐다. 지옥문이 닫혔다.


몇 년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버스 손잡이에 매달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털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꼼꼼히 남은 한 가닥까지 면도했다. 면도로 이게 가능하다는 자체가 감격이었다. 그러다 퇴사 1년 전 여름, 즐거운 가운데 의문이 생겼다. 왜 나는 털 때문에 괴로워했을까? 왜 내 겨털을 흉악한 괴물의 턱수염처럼 대했을까. 1년 간 고민은 이어졌다. 결론을 내렸다. 겨털이 흉악한 게 아니다.


여성의 몸에 난 털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여성 혐오 문화가
흉악하다.


레이저로도 없애지 못한 내 겨털의 생명력에 감사했다. 만약 다 사라졌다면 난 되돌리지 못한 겨털의 존재에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이 털을 밀지 않고 민소매를 입을 순 없을까. ‘하고 싶은, 당장 할 수 있는 일하기' 퇴사 원칙에 따라, 월간퇴사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겨드랑이 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큰 고민 없이, 부담 없이 ‘하자'라고 맘먹었다. ‘겨털살롱'으로 행사 이름부터 지었다.  


‘살롱'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여성 혐오 문화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목소리 낼 기회를 뺏었지만, 17~18세기 프랑스 여성 귀족 계급 중 몇몇은 자신들의 안전한 광장을 만들었다. 저택 안 살롱(응접실)에서 당대 최고의 명사부터 여물지 않은 사상가와 예술가들을 초대했다. 생각의 공론장을 조성했다.


안전하고 자유롭게, 경험과 관점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나도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외치고 싶었다. 나만 괴로운 건 아니죠? 왜 여자에게 털은 이렇게 중요한 대상이 될까요? 꼭 밀어야 하나요? 안 밀고 민소매 입으면 안 되나요? 밀든 안 밀든 괜찮은 사회는 어디 없나요?


겨털살롱의 기획, 홍보, 행사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라이프쉐어’라는 행사를 접했다. ‘어른을 위한 캠프'로 1박 2일 동안 서울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며, 다양한 질문으로 삶을 돌아보는 행사였다. 사랑하는 상암동 골목 서점, 북바이북의 자매 주인장님 중 한 분이 호스트(?)로 소개되셨기에 신청했다. 소중한 인연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확실히 새로웠다. 관심사가 달라도 이런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2일 차 오전, 하얀 원피스를 입은 단발 여성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명상 선생님이었다. 명상? 폭포수를 맞는 도인이나, 불교 수행자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명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삶을 윤택하게 도와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따뜻한 오전 햇살이 서서히 내려쬐는 한옥 나무 마루에 앉아 명상 선생님의 안내를 따랐다 눈을 감고 흘러가는 생각을 지켜보며 호흡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포도알을 이용한 먹기 명상도 이어졌다. 과육을 입안에 둔 채 서서히 혀로 눌렀다. 마치 시간을 슬로모션으로 늘려놓은 것처럼 순간순간이 한 호흡, 한 호흡으로 지나갔다. 그 순간에 존재하는 방법이 명상이고 곧 깨어있기였다.


평소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때가 간혹 있었다. 과호흡 아닌 과생각 상태. 그런가 하면 어떤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볼 때도 있었다. 유체 이탈해서 내 몸을 보는 것처럼 시선이 머리 위에서 주변 전체를 인식했다. 예를 들면, 벽에 등을 기대 한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무릎은 바닥에 둔다. 세운 무릎은 점점 오른쪽으로 기운다. 몸의 균형이 깨지며 오른쪽으로 힘이 모인다.


동시에 ‘음 몸이 오른쪽으로 무너지고 있구나, 근데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왜 알고 있을까, 난 역시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이러니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이거 명상이랑 연결된 거 아냐? 이 선생님에게서 계속 배움을 얻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은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 전문가였다. 미국의 유명한 의학자(존 카밧진 메사추세츠 대학 의과대 명예교수)가 불교의 명상법을 종교와 무관한 의학적 치료 명상법으로 개발했고, 그 명상법을 공부하신 분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들었다. 인도 여행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오자 평화는 쉽게 깨졌고 일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으로 명상을 선택했다.


선생님은 라이프쉐어 같은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명상법을 나눈다. (참고로 명상 선생님일 뿐 아니라

마인드트립이란 회사를  운영하며 연남동, 종로 여행 가이드로도 활동한다. 얼마 전엔 앞편애서 소개한, 내가 아는 가장 어린 독립러 가현님과 태백에서 명상 행사도 열었다) 라이프쉐어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명상 워크샵을 운영 중인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명상하고 앉아있네'. 여름 내내 마음챙김 명상 책을 찾아보고, ‘명상하고 앉아있네'에서 수련하며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생각이 많아 혼란스러웠던 나는, 생각의 흐름과 속도를 지켜보며 나로 변했다. 명상을 통해 ‘직면하기'란 말을 얻었다. 생각을 직면하고, 나아가 마음과 몸까지 직면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조금 맛을 봤다. 선생님한테 겨드랑이 털을 주제로 명상 세션을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다. 제거에 대상으로만 여겨진 겨드랑이 털, 매끄러워야 한다는 상식에 갇힌 겨드랑이를 직면해보자고.


페미니즘 책으로 독학도 시작했다. 여성 혐오 문화에서 털은 어떤 존재였나, 그중 겨드랑이 털은 언제부터 제거 대상이 되었나. 여성의 겨털에 대한 전문서적은 없었기에, 페미니즘 입문서부터 전문 서적, 칼럼까지 책을 뒤져야 했다. <털-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완전한 여성>, <유럽의 살롱들>, <몸 숭배와 광기>,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아름다움의 발명> <배드 걸 굿 걸>,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비너스의 유혹: 성형수술의 역사>, <뚱뚱해서 죄송합니까?>, <진짜 여자가 되는 법>  등등.


"유럽이나 비유럽권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자신의 체질과는 상관없이 체모 면도라는 고문을 감당해왔고 또 그래야만 하는 쪽은 오로지 여성들이었다. (64, <털-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그러던 중 겨드랑이까지 포함된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전쟁 후 여성 해방의 물결 속에서 몸의 자유를 돌려주는 의상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의상을 제대로 이용한 쪽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1915년 미국의 월간지 <하퍼 Haper>는 당시 감각으로는 반라나 다름없는 여성의 사진을 게재하고 그 옷의 제단 견본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그러자 각 언론 사회면의 칼럼들은 일제히 포문을 열고 도대체 어느 정도 여체를 노출하는 것이 적정선인가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인다. 여자의 여자다움만을 신경 써야 하는 대부분의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할 것을 권한다. 그러자 미적 기준에서 본 매끈한 피부를 둘러싼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신체위생에 관한 논쟁으로 번져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미국의 화장품산업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로 ‘여성과 위생'을 내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대적인 광고 공세에서 체모, 특히 겨드랑이 털은 해로운 박테리아의 온상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핵심은 박테리아를 물리칠 무기가 시급히 요청된다는 것이다. 화장품 산업은 곧 일련의 탈모제들을 출시했고, 박테리아 악몽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다. (80, 같은 책)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도 여성용 면도기 광고를 통해 이를 부채질했다.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문구가 자본주의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산업화와 현대화가 뒤늦게 이어진 한국에선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성의 겨털이 문제 되지 않았다. 배우 김수미가 젊은 시절 찍은 속옷 광고 사진에는 겨드랑이 털이 그대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광고는 없다



여성 혐오 + 겨털 혐오의 역사를 찾아 행사를 구성하고, 홍보 페이지를 만들고, 홍보 영상과 포스터를 만들고, 행사 장소를 찾고, 모객에 나서며 완전히 지쳐버렸다. (포스터 제작을 위해 내 겨털 사진을 찍어준 소중한 애인에게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행사에 대한 내 계획과 의도를 들어주고, 전반적으로 도와주는 감사한 분이 계셨지만, 함께 주도권을 나눠 일하는 감각과는 달랐다. 기획부터 협업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해 여름을 넘기지 않으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협업할 사람들을 찾으면서 겨털살롱과 비슷한 행사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천하제일 겨털대회'라고 불꽃페미액션이라는 페미니스트 그룹이 이미 작년에 그런 행사를 치뤘다. 어떻게 접촉할지, 협업을 제안할지 몰라 그중 한 명에게 연락을 취하다가 흐지부지됐다. (페메를 보낸 것 같긴 한데 나도 기억이 흐릿하다)


어찌어찌 행사는 진행됐다. 강남 한복판 주택가, 평소 사진 스튜디오로 이용되는 마당 있는 2층 주택을 빌렸다. 80만 원 좀 더 들었던 것 같다. 이후 선거에 나가기 전까지 퇴사 후 가장 한 번에 많이 쓴 활동 자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쳤지... 근데 그 장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널찍한 마당, 한적한 주택가, 의자로 둘러앉을 수 있는 1층 거실, 바닥에 앉을 수 있는 빛이 들어오는 2층. 다시 돌아가도 아마 그 장소를 선택할 것 같다 (ㅠㅠ).


참석자들을 1층에 모시고 행사를 시작하는데. 가슴이 떨렸다. 이 자리에 이렇게 모여준 것만으로, 아직 행사 시작도 안 했건만, 기쁨이 차올랐다. 이날을 위해 연습한 엔스파이럴(뉴질랜드 활동가 네트워크)의 아이스 버닝 방법으로 참가자들 간 소개를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 명상을 했다. 그 날의 모습이 펜 기록으로 남아있다.



겨털살롱은 퇴사 후 혼자, 최초로 치른 문화행사였다. 조직 밖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일이었고, 혼자선 아무리 의미 있는 일도 널리 알리기 어려움을 깨달은 일이었다. '함께', '연결'이라는 키워드가 얼마나 나를 감동시키는지 알려주는 계기였다. 이런 행사는 앞으로 절대 혼자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혼자는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함께 해야 더 넓은 파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행사 후 후속 모임을 두 번 가졌다. 참석자들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 겨털 명상이라는 특별한 시간을 같이 나눴다는 점 때문에 커뮤니티로 모임을 이어가려는 욕구가 보였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적으로 내 탓이다. 2017년 겨털살롱 이후 2018 겨털살롱은 기획조차 하지 못했다. 2018년 여름, 무소속 구의원 낙선 후 선거뽕이 빠지면서 내 인생 최악의 바닥이 시작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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