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으로 달리던 경주마가 멈춰선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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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퇴사는 기존 사회 질서에 금을 긋는 청년 세대의 무의식적 집단 행위다.’ 얼마 전 다녀온 한 포럼에서 발표한 문장이다. 청년자치정부(서울시의 청년 정책 집행기관) 추진위원회의 ‘새로운 규칙 포럼’ 세번째 시간으로, 주제는 퇴사였다. 퇴사자 교육 회사 대표, 실업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 연구자, 직장 내 갑질 대응단체 활동가 등이 모였다. 이들은 퇴사해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문제의식을 쏘아 올렸다. 나의 경우 퇴사자에 대한 낙인을 조직과 사회로 돌리고 ‘청년 퇴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퇴사 고민’의 밑바탕에는 변화의 에너지가 넘실댄다. 1년11개월간 여러 전·현직 퇴사러를 만나 느슨하게 이어져 살아온 나에게 퇴사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계발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허덕이는 청년에게 퇴사란 경쟁 끝에 얻은 성공의 트로피(입사)를 내동댕이칠 수 있는 순간이다. ‘이대로 이런 일만 하고 살아도 될까’ 고민을 시작한 ‘요즘 젊은것들’은 조직 밖에서 기존에 없던 일을 만들거나, 조직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일을 벌인다. 퇴사 여부와 별개로 삶과 일의 의미를 재정립해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기도 한다. 등을 내리치는 채찍에 달려가던 경주마가 잠시 멈춰서, 이 방향과 속도가 맞는지 상기하는 시점이 바로 퇴사를 고민할 때다.
퇴사 이유에는 개인과 조직이 얽혀 있다. 일과 삶을 일치시키려다 소진돼버려서, 리더·상사의 갑질 방지책이 없어서, 구조를 바꾸지 않는 조직의 판단력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혹은 이런 이유로 퇴사한 동료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퇴사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런데 ‘청년 퇴사’를 향한 시선은 편견에 파묻혀 있다. 고민 없이 조직에 들어온 성급함의 결과, 미래보다 현재만 중요하게 여기는 참을성 없는 선택,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의 말로 등등. 이런 현실에서 퇴사 고민이 사회 변화 에너지로 승화되기란 쉽지 않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허탈함, 조직과 사회에 대한 불신은 사회를 바꿀 이유 대신 자기계발의 필요성이 될 뿐이다.
‘청년 퇴사’를 향한 낙인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친다.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채용 공고로 사람을 뽑아, 쓰고 버릴 부품처럼 일을 시키는 유기체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미래는 수많은 현재가 모여 만들어지건만, 현재가 지옥 같은데 더 참으라는 조언은 조직을 빨리 나가라는 소리. 퇴사 청년에게 조직 부적응자 꼬리표를 붙인다면, 그 화살은 조직을 향해 ‘미래 부적응 집단’이란 이름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체적인 탈락·합격 기준 공고, 조직 내 갑질 방지책, 회사의 성장과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절실함을 이 사회에서 찾기 어렵다.
청년이 퇴사를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리는 착한 경주마가 될 수 없음을, 늦었지만 알아차렸다는 의미다. 기존 세대가 리더인 조직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우리의 예민함과 개성, 사고방식은 회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 퇴사’는 반성할 줄 모르는 낡은것들에게 요즘 젊은것들이 보내는 신호다. 우리를 가르치거나 위한다거나 낙인을 찍기 전, 먼저 처절하게 인정하라는 요구다. 너희는 지속 가능한 일터와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단지 먹고살 수 있는 국가를 물려준 것만으론 면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한겨레칼럼/2030 리스펙트] 너희가 퇴사를 아느냐 / 곽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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