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벌이고, 쓰고 싶은 글을 끄적이며(다 쓰진 못함) 보낸 지 6개월 차,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내가 정말 원한 일은 ‘글쓰기’보다 한 단계 더 추상적인 욕구, ‘표현하기’였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아름다운, 진리와 진실을 담은 무언가를, 가능하면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 이 표현 욕구, 활동의 다른 말이 떠올랐다. 예술. 난 예술가가 되고 싶은 걸까.
6개월 전까지 글쓰기는 나의 감성과 관점,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내 소망은 단 하나, 죽기 전 ‘작품’을 남기는 일.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같은, 놀라움과 충격과 감동을 만드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수단을 찾고 싶다. 글을 잘 써서가 아니다. 글로 채워지지 않은 여백 때문에.
어느 날 머릿속에 총천연색 불꽃과 로켓이 날아다니는데 글로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 막막했다. 에베레스트 산에 가본 적 없지만, 그곳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감수성은 한 자, 한 자 쓰는 글보단 물감처럼 빠르게 퍼져나가게 더 편했다. 보다 정돈된 생각이 나돌 때라도 한 글자, 한 글자 연필로 쓰기엔 글자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조정래 선생이 들어갔다 나온 글쓰기의 감옥을 동경했지만 난 그런 스타일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요즘엔 연필로 글쓰기를 거의 포기했다. 연필로는 디자인을 한다는 생각으로 끄적이고, 쓰기는 노트북을 이용한다. 이 글 역시 그렇다.
글쓰기 하고는 뭔가 잘 맞지 않고, 그림이나 음악적 지식과 기술은 전무한 내가,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삶을 예술로 만들자는 생각은 이런 고민 속에 나온 대안이다. 예술의 기본은 무형의 아름다움을 형상화시킬 수 있는 의식이나 예식, 혹은 규칙이라고 전제할 때, 삶 속 한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식화한다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만난 한 예술가는 이 이야기를 쭉 듣더니, 삶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그 무언가의 이름을 ‘악보’라고 지칭했다. 악보, 삶의 악보…(감동 중…) 자신만의 악보를 정리할 수 있다면, 악보를 통해 내 삶을 연주할 수 있다면. 노년에 들어 과거의 악보를 반추하는 대신 내가 내 삶의 악보를 만들어 연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나에게 플럭서스(Fluxus)를 소개했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 아닌 일상에서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플럭서스는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로, 엘리트 예술을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행위예술의 한 형태다. 1960년 뉴욕, 리투아니아 출신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조지 마키우나스는 전통적 예술형식과 양식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생각을 알리기 위해 잡지를 구상했다. 이 잡지의 명칭이 플럭서스였는데 재정난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마키우나스는 독일로 갈 계획을 세우며 백남준과 서신교환을 통해 플럭서스라는 이름의 예술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백남준의 예술세계 ‘플럭서스’를 아시나요? - <플럭서스 예술혁명> 전선자, 2011)고 한다.
“플럭서스는 직선적인 과학과 권위가 만들어놓은 신화를 깨고, 모든 전통 개념에서 자유롭고, 창작자와 수용자가 일체가 되길 원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미래를 사유하며 사회를 변화시키길 바랐다.”(<플럭서스 예술혁명> 저자 특별 강연회, 2011) 백남준을 단지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만 알던, 미술사에 무지한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삶의 악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좋은 기운이 나를 내리쬐는 것 같다-라는 말은 퇴사 초 자주 했다. 퇴사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어쩜 이렇게 나에게 좋은 에너지, 영감, 자극, 인연을 주는지. 이것은 필시 우주의 기운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 아닌가! 내가 애정 하는 한 지인은 ‘그런 깨달음을 인지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요즘 그동안 벌린 일을 바삐 처리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다시 그 기운이 느껴진다. 이 글을 읽는 친구들에게도 좋은 기운이 전해지길 바란다.
우주가 보내준 기운을 받아 어제 내가 찾아간 곳은 청계천 일대였다. 업사이클 페스티벌 류流가 어제(18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24일)까지 열린다. 폐섬유로 만든 업사이클 캔버스에 누구나 무엇이든 그려서 전시할 수 있는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나 역시 한 점 보태고 왔다. 예술가 12명이 작품에 재생과 복원의 의미를 넣은 부스도 운영 중이다. ‘Real life store’ 부스에선 미술가 김현우님이 관객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그릴 수도, 관객이 붓을 들고 함께 그릴 수도 있다. 마지막 날(인가 그다음 날 다른 전시회에서였나) 그림을 판매하는데, 수익은 관객과 함께 나눈다고 한다. 무척이나 느낌이 좋은 분이었다. 저와 케미가 잘 맞는 분들께 이 부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