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맞이 1일 1복기 (1)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던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취향대로 삶을 꾸린다면 세상에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았다. 생각하고 공상하며 판타지와 sf를 보며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에게 끌린 예민한 십 대에게 미래는 부적절해 보였다. 무소의 뿔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당당하고 멋있는,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이 이상형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20대 중반에는 영화 속 멋진 ‘남자 기자’처럼 되고 싶었다. 술 잘 마시고, 취재원들에게 능수능란한, 조직에 필수적인, 신념과 직업정신으로 투철한. 정론직필 언론인의 역할이란 얼마나 빛이 나던지. 그런데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치명적이기까지 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부터 최순실 보도가 나기 몇 개월 전까지 이어진 참사와 잔인함과 현실을 지켜보고 기록하며, 혼자 우는 일이 잦았다.
괴로운 옷을 벗었다. 어울릴 것 같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착각이었다. 영리 기업 구성원이란 얼마나 낯선 옷이던지. 버틸 자신도, 버티고 싶은 마음도 없기에 좋은 자극만 가슴에 품고 옷을 벗었다. 벌거숭이가 됐다. 당장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벌였다. 그사이 촛불집회는 촛불혁명으로 치달았다. 늦게 온 봄이었다. 인생에도, 사회에도.
천둥벌거숭이처럼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불편하고 불쾌한 건 잊지 않고 발화하며 기억하며 8개월을 지냈다. 나는 어릴 때처럼 민감해졌다. 까탈스러워졌다. 자기다움과 미니멀리즘, 명상, 비인간동물권, 복기 등의 말에 물들어갔다. 더 자주 의심하고 성찰했다. 민감이 생활이 됐다.
혼자 성취한 일은 아니다.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소중한 사람,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 덕에 점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이 좋다. 이런 내가 좋다.
2018년, 더욱더 민감한 사람이 될 것이다. 더더욱 까다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좀 더 용기를 내려한다.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사람들의 충고를 지지대 삼아, 자기성찰의 시간을 무기 삼아. 세상에 무슨 일이든 다 벌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되, 더 민감해지고 더 떠들어야지. 더 시끄러워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