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승희 Jan 05. 2018

명함 안 받았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1987>을 보며 '명함 안 준 그 기자'를 떠올리다

Photo by Adrianna Calvo from Pexels


얼마 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했다. 지난 한 해 내가 겪은 일 중 가장 재미있고 불쾌한 사건이었다. 내가 잘 모르는 세계를 개구멍으로 엿본 것 같기도 했다. '정치'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여자는 어떻게 지워지는지, 기득권을 가진 기록자들이 약하고 힘없는 것들을 어떻게 지워가는지 작동원리를 상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때는 2017년 12월 중순, 여의도 국회 건너편 스타벅스에서 열린 ‘노마드 시위’. 스벅의 황토색 바 테이블 위를 안내판 몇 개가 점거하고 있었다. 안내판 내용은 절실하지만 귀엽게, 국회의 정치개혁 입법안 합의를 촉구했다. 우리가 직접 손으로 적은 내용이었다. 시위 제안자 분과 나는 직접 민주주의 프로젝트 정당 우주당의 일원으로 테이블 왼 편에, 우리 앞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단체 소속 남자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는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 분도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나에게 웃기고도 짜증 나는 경험을 만들어준 그분이다. 나는 이 분의 이름을 모른다. 왜냐면 시위 제안자와 나에게만 명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면 그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화 방향과 명함을 주고받는 대상은 오로지 내 맞은 편의 남자 분 뿐이었다. 모 언론사 정치부 기자라고 자신을 밝힌 그는 우리가 ㄱㅁㅇㄷ 당원인 줄 알았다며, 노마드 시위의 성격을 물었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젊은 청년 정치인들, 활동가들을 만나고 싶다고도 했다. 인터뷰도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명함을 건네고 사라졌다. 내 맞은편 남자분에게만. 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겨. 저기요, 저 옆에서 엄청 떠들었는데 ㅋㅋ 저 안 보이세요?ㅎㅎㅎ 


*상황 재현*


       (연대자) 0      

ㅡㅡㅡㅡㅡㅡㅡ↖︎ㅡㅡ(스벅 바 테이블)

     0       0  →    0

(제안자) (나)    (기자)



나는 그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 짧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했다. 이 시위의 제안자는 내 옆의 이 분이고, 여기가 뭐하는 곳이고, 잠시 후에 만나고 싶어 하시는 그 젊은이들이 더 도착하리라 등등. 당신이 기사를 통해 알리고 싶어 하는 그 가치를 말하는데 매우 적합한 사람들이 여기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특히 국회나 행정부에 여자가 적다는 문제의식, 이런 멋진 시위를 떠올린 여자 제안자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동시에 이 남자가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있구나라는 감각을 느꼈다. 아니, 일단 나를 쳐다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여자를 정치의 주체로 인지하지 않은, 게으른 메이저 미디어 기자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나와 제안자는 남자 활동가와 함께 하는 수동적 동지이지, 주체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 수동적 존재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명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 기자 한 명만의 한계일까?


영화 <1987>이 여자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칼럼이나 트윗글을 읽으며, 당시 이대 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보며, 나의 <2017 재미있고 불쾌한 사건 best1>이 다시 떠올랐다. 여자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를 보고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게으르고 일차원적인 사람들이 점점 도태되곤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매거진의 이전글 민감인 선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