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어떤 학생이라도 일정 수준까지는 학습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교육 가능성의 수준은 초·중등학교의 경우 기초·기본학력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전문적인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학습지도 전문가인 교사들이 모든 학생들에게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학력을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책임지고 가르쳐 줄 것이라는 교육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교육계 내부의 기초·기본학력 책임지도에 대한 관점과 실상은 어떤가. 교사와 교육행정가들은 많은 학생들이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학력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학년이 올라 갈수록 수업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고민하는 학생들, 그 때문에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고 일탈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교육계 내부에선 주지의 사실이다. 가끔 다수 학생들의 기초·기본학력 부진 현상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기초․기본학력 정착에 대한 학생, 학부모, 교원의 그리고 정책적인 관심과 대책은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학습부진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진한 학습결과에 대한 불만제기와 요구 또한 매우 미약하다. 공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무관심 탓이요, 학생 자신의 낮은 지능 탓이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떳떳하게 학습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 최근 들어 기초·기본학력 문제가 교육정책의 중심 과제로 대두되어 법률 제·개정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2월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제28조(학습부진아 등에 대한 교육)가 동년 8월부터 시행되었다.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학습부진 학생에 대한 개념이 명료화되었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으로 국가와 지자체의 실태조사, 지원 교재와 프로그램 개발, 관련 방안에 대한 교원연수 의무화 등이 상세하게 제시되었다.
현재는 미국의 ’학생전원성취법‘과 유사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이 2016년 6월 대표발의한 ’기본학력 보장법안‘과 같은 당 박경미 의원이 대표발의한 ’기초학력 보장법안‘을 종합·조정한 ’기초학력 보장법안‘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여 법제사법위원회 심의 단계에 있다. 이 법안에는 교육부장관이 직속 기초학력보장위원회 심의를 거쳐 5년마다 기초학력 보장 종합계획 수립하도록 의무를 부여했다. 시·도교육감은 종합계획과 해당 지역 여건을 고려해 매년 시·도 기초학력 보장 시행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 학교장은 학습지원 대상 학생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학생별 학력 수준과 기초학력 미달 원인을 종합 진단하기 위한 '기초학력 진단검사'를 실시할 수 있다. 이 검사를 통해 학습지원이 필요한 학생을 선정하고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효율적인 학습지원을 위해 전담 교원을 지정할 수 있다는 책임과 역할 규정이 담겼다.
이렇듯 기초·기본학력 부진학생을 위한 법적 체계화가 이뤄지고 있는 점은 다행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실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교육의 질적 책무성, 특히 모든 학생들에게 기초․기본학력을 보장하고자 하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9월 26일 미국의 한 일간신문(New York Daily News)은 고등학교 1학년생인 Jeolis Polanco와 그녀의 어머니인 Aurora Giron이 뉴욕시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한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내용인즉 고등학교 신입생으로서 선택형 시험에서는 영어 65점, 사회 80점을 받았지만 독해와 작문능력이 초등학교 5학년 수준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에 방학 동안 학습지원 전문강사로부터 160시간의 보충학습을 받는데 필요한 15,000달러를 지원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학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해도, 특히 기본적인 읽기나 쓰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별도의 보완조치 없이 상급학년으로 진학시키는 자동진급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실제로 블룸버그 당시 뉴욕시장은 3학년과 5학년 진급 때 실시되던 낙제제도를 고등학교 입학 전인 8학년에서도 도입하고자 공청회 등을 개최했으며 2009년에 이를 법제화했다. 최근까지도 미국에서는 낙제제도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점차 학력수준이 낮은 편이라도 인성 측면 등을 고려하여 낙제학생 비율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기초·기본학력 책임지도에 대한 정책의지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2016년 1월 초·중등교육법(ESEA: the Elementary and Secondary Education Act)을 개정하면서 별칭을 기존의 아동낙오방지법(NCLB: No Child Left Behind Act. 어떤 아이도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에서 학생전원성취법(ESSA: Every Student Succeeds Act, 모든 학생들이 성공해야 한다)으로 명칭을 정한 것에서도 기초·기본학력 보장에 대한 정책의지를 엿볼 수 있다. 미국에서 이 두 가지 정책들은 새로운 법률이라기보다는 1965년 제정된 연방법인 초·중등교육법(ESEA: the Elementary and Secondary Education Ac)의 별칭이다. 이 별칭을 쓰는 목적은 교육법과 그에 따른 교육정책의 핵심을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별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미국에서는 NCLB법 체제에서는 초등학교 시기를 중심으로 한 아이도 예외 없이 학습에서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고, ESSA법 체제에서는 아동기를 포함하면서 고등학교 시기까지 확대하여 모든 학생들이 대학교육과 취업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졸업시키겠다는 정책의지를 담고 있다.
미국의 구교육법인 NCLB와 신교육법인 ESSA는 모두 기초·기본학력 보장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책무성을 중시하고 있다. 둘 다 책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어와 수학 성취수준을 확인하는 학력평가를 실시하고, 일정 기준의 학력수준에 미달하는 학생이 많은 학교, 특히 하위 5%의 학교에 대해서 특별 관리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두 개의 법률에서 다른 점은 학력평가 추진 및 미흡학교 관리 방법이다. NCLB법 체제에서는 연방정부에서 동일한 유형의 학력평가를 실시하고, 책무성 미흡 학교에 대해서는 민간기관 운영으로 위탁하거나 교장과 교사를 해고하는 단계까지 이뤄졌다. 이에 비해 ESSA법 체제에서는 주정부 단위로 학력평가를 실시하되, 학력향상 미흡학교와 교직원 대책을 이전보다 상당히 유연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정부와 주교육국의 기초·기본학력 관리에 대한 자율성과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법개정에 대해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교원단체는 윈-윈-윈(win-win-win) 전략이라고 만족을 표시하고 있다.
낙오학생방지법(NCLB)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행 중인 기초학력 보장법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의 교육 구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교육부는 올해 3월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의 비율이 대폭 증가한 결과에 따른 기초학력 지원 내실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한 아이도 놓치지 않고 기초학력을 책임진다‘로 보도자료를 제시했다. 서울시교육청에서도 올해 9월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을 위해 ’모든 학생 끝까지 책임지는 기초학력 보장 방안‘을 발표했다. 미국의 기초학력 보장 관련 법안들이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작단계에 들어선 우리의 기초․기본학력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미국의 사례에 비춰보면 생각해 볼 것들이 매우 많다. 우수학생 중심의 대학입시 위주 교육의 그늘에서 학습부진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교육청이나 학교를 상대로 자녀 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요구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점, 그러기에 책임교육 담당자들의 책임의식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성적 부풀리기로 기본적인 국어독해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평가체제, 기초․기본학력이 아무리 부족해도 진급할 수 있고 심지어 학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4년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는 교육체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을 공언하면서도 책임이 드러날 수 있는 기초학력 평가에 대해서는 줄세우기 교육이라는 핑계를 대거나, 지식보다 역량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적극 반대하는 일부 교육청과 교사집단의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 교육에서도 기초·기본학력 부진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체제가 구축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누구보다도 먼저 교육계 내부에서 모든 학생들의 기초․기본학력 보장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더욱 노력할 것을 기대해 본다. 오늘 11월 30일에 예정대로 2019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가 발표되었다. 지난해는 학력수준이 급격히 하락하여 평가결과 발표 시기를 두 번이나 연기할 정도로 교육부에서 긴장했었는데 올해는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라 안도(?)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며칠 후 12월 3일엔 2018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연구(PISA) 결과가 발표된다. 결과에 대해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국제적 수준에서 최근 심화되고 있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의 증가 추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이 글은 교육연구단체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공교육 희망> 칼럼(2019.11.20.)에 실린 것을 칼럼 발표일에 맞추어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