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좋아하며 살았는지를 잊고 살았다.
며칠 전, 유진이가 집에 들렀다. 지금은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우리 부부에게 유진이는 여전히 ‘우리 딸’ 같은 존재다. 처음 만난 건 유진이가 열다섯 살이던 때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고비마다 서로의 곁을 지켜준 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진이는 언제나 우리 집을 마음 놓고 드나드는 그런 아이였다.
언제나처럼 밝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던 유진이가, 이번엔 조금 다른 표정으로 물었다.
“목사님은 요즘 뭐가 제일 좋아요?”
그 말에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들었지만, 도통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의 질문이었건만, 나는 선뜻 말 한마디를 못 꺼내고 말았다. ‘좋아하는 것’이라니. 그런 걸 마지막으로 생각해 본 게 언제였던가. 할 말이 없는 침묵 속에서, 마음 어딘가가 툭,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니, 참 오래도 잊고 살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해 본 적이 없었다. 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해야 할 것이 있고, 맡겨진 책임이 있고, 누군가는 기대고 있으니, 내 감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접어 두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세월을 살아냈고, 살아온 만큼은 또 미련 없이 주님 앞에 드렸다 믿었는데, 유진이의 그 한마디가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날 밤, 베개 위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뭘 좋아하던 사람이었더라. 어린 시절의 나를 하나하나 불러내 보았다.
딱지치기. 책받침 한 장에 온 마음을 걸고,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던 시간. 그건 단순한 놀이라기보다, 세상과 겨루는 작은 전쟁 같았다. 구슬치기도 그랬다. 반짝이는 유리알에 햇살이 스며들면, 그 속엔 무지갯빛 세계가 펼쳐지곤 했다. 그 작은 우주를 내 손 안에 넣기 위해 우리는 땀을 흘렸고, 어깨를 부딪치며 웃었다.
학교 운동장엔 언제나 흙먼지가 날렸다. 우리는 운동장에 선을 그어 오징어 게임을 하고, 줄개진, 개 뼈다귀 같은 놀이를 했다.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는 그 시절 놀이들. 몸은 새까맣게 그을려도, 마음만은 한없이 가벼웠다.
조금 자라서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디즈니 동화책을 하루가 멀다 하고 펼쳐 들었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꺼내어,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 울고 웃었다. 위인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그들도 외롭고 두려웠고, 그래서 나 같은 아이에게 위로가 되었다.
방과 후에는 만화방으로 향했다. 책 냄새 섞인 조용한 공간에서, 만화책 한 권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 안엔 또 다른 세계가 있었고, 나는 그 세계의 아주 작은 단역이라도 된 것처럼 설렜다.
더 어릴 적에는, 동네 아이들과 산을 타고 넘었다. 그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는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배가 고프면 아이들끼리 산에서 보리수나무를 찾아다녔다. 빨갛게 익었지만 아직 떫은 보리수 열매를 따서 입에 넣고, 서로에게 건네며 그걸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입안이 시고, 혀끝이 까끌까끌해도 우리는 그게 참 맛있다고 느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웃음만큼은 늘 배부르게 가지고 다녔다.
그렇게 산을 넘고, 다시 넘고, 웃고 떠들며 걷던 그 길. 누가 보면 고생이라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마치 산 하나를 정복한 모험이었고, 인생 전체를 다 살아낸 하루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으레 한소리 하셨다. “어데를 그리 헤매고 다녔노, 얼굴이 까매서 못 알아보겠다.” 그러면서도 물 한 바가지를 받아주시고, 찬밥 한 덩이에 김치 몇 조각을 얹어주시던 그 손길은 지금도 내 기억 속 가장 따뜻한 저녁밥상이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좋아하는 것들의 모양도 많이 달라졌다. 아내와 함께 작은 정원에서 온갖 꽃들을 가꾸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다. 봄이면 라일락과 튤립이 피고, 여름이면 해바라기와 백일홍이 정원을 환히 채운다. 꽃이 피면 마치 우리가 잘살고 있다는 증거라도 되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마당으로 나가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본다.
흙냄새도 좋다. 갓 비 내린 뒤 마당을 스치는 바람 속에 섞여오는 그 냄새는 마음을 툭툭 두드려준다. 비 오는 날엔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고, 여름밤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걸 좋아한다. 그건 꼭 어린 시절의 자장가 같다.
집에 누가 주고 간 호박이나, 우리가 키운 상추나 고추 같은 것들이 생기면 이웃들과 나눠 먹는다. 특별한 것도 아닌데, “이거 어제 따놓은 건데…” 하고 손에 들려보내면 받는 이도, 주는 이도 괜히 웃게 된다. 그 웃음이 좋아서, 나는 자주 작은 소쿠리를 들고 마당을 돈다.
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참 좋다. 그때그때 생각해낸 우리만의 놀이, 이름도 없고 규칙도 제멋대로지만 그 순간만은 온 우주가 우리만의 것이 된다. 종이 하나, 돌멩이 하나, 그림 하나에도 웃음이 터진다. 아이들과 놀고 나면 늘 마음이 맑아진다. 그 웃음 속에는 내가 오래 잊고 지냈던 순수함이 다시 깨어나는 것 같다.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즐긴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있고,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며 웃거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 기대어 쉬는 그 시간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해 질 무렵,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하루의 마침표 같고, 살아 있음에 대한 조용한 감사처럼 느껴진다.
가곡사랑모임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직접 곡을 써서 연주해보는 일도 좋아한다. 박수 소리도 좋지만, 무엇보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피어나는 듯한 감각이 좋다. 어린 시절 구슬을 굴리던 손끝의 떨림과는 다른, 한층 더 여문 떨림이다.
그리고 하나 더, 빼놓을 수 없는 좋아함이 있다. 아이들, 준서와 서정이가 어릴 적, 야간대학을 다니던 엄마를 기다리며 매일 저녁 아이들과 레슬링을 하던 그 시간. 웃고, 뒹굴고,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그때의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아빠 품을 세상 전부처럼 안고 잠들었다.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들이지만, 토요일이면 꼭 모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식탁 위엔 반찬보다 웃음이 많고, 이야기보다 마음이 넓다. 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했던 것들은 지금도 내 곁에 있다. 다만 조금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해졌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걸 곁에서 나눌 수 있는 삶은, 참 다행한 삶이다.
유진이가 다시 와서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진아, 나 요즘은 말이야... 흙냄새도 좋고, 아이들과 노는 것도 좋고, 아내랑 걷는 길도, 아이들과 함께했던 옛날 레슬링도, 가족이 모이는 저녁 식사도 참 좋아.”
나를 흔든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났다. 좋아하는 것들 하나하나에 마음을 얹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어린 나와 함께 걷는다.
흙냄새와 빗소리, 사람의 온기와 웃음이 흐르는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