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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어릴 적 바라본 어머니의 일상

by 강석효

어릴 적, 마을 어귀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작은 가게는 어머니의 삶의 터전이었고, 우리 가족의 생계였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가 뜨기도 전, 하얀 고무장화를 신으시고 밭으로 나가셨다. 그곳에서 고구마순을 따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한 포기, 한 포기 고구마순을 뽑아 올리실 때마다 작은 숨을 내쉬시던 그 소리. 아이를 낳고, 기르고, 길에서 기다리며 수없이 내쉬던 한숨과도 같았다. 그 숨결에는 온 가족을 위한 기도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가 흙을 만지실 때, 나는 몰랐다. 그 흙 속에 뿌려진 것이 단지 씨앗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였다는 것을. 어머니의 손끝에서 기도는 자라났고, 그 기도가 우리의 삶을 붙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그렇게 밭일을 마치면, 허리를 천천히 펴고 두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시곤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작은 구멍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 안쪽 모퉁이는 어머니의 쉼터이기도 했다. 가게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시다가, 너덜너덜한 공책을 펼치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어머니만의 방식으로 외상값을 적으시거나, 글을 모르셨기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내게 적으라고 불러주셨다.


그 외상장부를 넘길 때마다 어머니의 손끝에는 조용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이 집도 잘 되어야 할 텐데…',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그저 숫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머니의 기도 속에 있었다. 외상장부 속에 적힌 이름들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어느 집은 갓난아이가 태어나 밤잠을 설치고, 또 어느 집은 남편의 일감이 끊겨 생활이 막막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그 이름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두셨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기도였다.


어머니는 외상장부를 넘기며 동네 모든 가정들의 근심을 마치 자신의 일인 듯 한숨으로 대신 쉬어주고 계셨다. 어느 날, 가게 안쪽 모퉁이에 앉아 조용히 골목길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을순이누나네 어머니를 보시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먼 길을 걸어오는 그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며, 어머니는 서둘러 물 한 잔을 건네셨다. 을순이 누나네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후부터는, 을순이네 이름 옆에는 별표가 그려졌다. “얼른 나으셔야 할 텐데…” 어머니는 물끄러미 길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기도가 단지 그분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걸.

그 기도는 어머니가 밭에서 땀 흘리며 거둔 수확처럼 자신의 자식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뽑아오신 고구마순을 다듬으며, 낮에는 가게 앞에 앉아 손님을 맞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다. 하루의 끝자락, 피곤한 몸을 가게 안쪽 모퉁이에 기대고 졸고 계실 때면, 그 곁에 앉아 가만히 숨소리를 들었다. 지친 숨결이었지만, 그 숨결에는 오롯이 가족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 기도가 내 삶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야 그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흙을 만지시며 뽑아 올리던 고구마순, 가게에서 넘기던 외상값 외상장부의 한 장 한 장, 그리고 가게 한쪽 모퉁이에 기대어 내쉬던 한숨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씨앗처럼 뿌려져 있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 그것은 단지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 길 위에 어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의 기도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삶을 붙들고 있다. 때로는 힘들고 지치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기도는 내 발을 붙잡아 준다. 가게 안쪽 모퉁이에 기대어 졸고 계시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그리워진다. 그 숨소리 속에 담긴 사랑과 기도가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머니의 기도는 씨앗이었다. 밭에 뿌려진 고구마순처럼, 우리 삶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서, 나를 지탱하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하셨듯, 나도 누군가의 삶에 씨앗을 뿌리고 있다.


어머니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흙 속에서, 작은 가게의 너덜너덜한 외상장부 속에서, 그리고 내 가슴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 기도는 언젠가 더 큰 열매로 맺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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