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눈물버튼이 하나쯤은 있다.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을때다. 학교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가 내게 길을 물었다.
잘은 몰랐지만 그래도 같이 가다 보면 나올 것만 같아서 "제가 알 것 같아요"라는 애매한 말을 하고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갔다.
사실 속으로는 자신없어 쫄긴 했지만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가 동네를 빙빙 돌 생각을 하니 차마 모른척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가 말하는 곳과 비슷한 곳을 돌고 돌아 몇십분을 갔던 것 같다.
중간에 어떤 친절한 아저씨를 만나 단숨에 할머니의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후회했다.
처음부터 똑똑한 어른에게 부탁할 걸. 괜시리 할머니를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 있는데 멀리서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다.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선생님(선생님이 우리 아빠와 무척 친한 사이여서 바로 전화하신 것 같았다)이 전화를 받고 진땀을 흘리며 나를 찾아다녔던 모양이셨다.
호되게 그 자리에서 혼이 나고 있는 내게 할머니가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엄마를 진정시키셨다.
자기가 더 미안하다고. 학교 가는 시간을 잘 몰라서 그랬다고. 그러니 그만 혼 내라고.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유독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약하다.
단, 인상이 선한 분에 한해서이다.
버스비가 몇백원 부족한 할아버지 차비를 대신 내주기도 하고 길을 몰라 헤매면 지금도 나는 열심히 길을 찾아 드린다.
대형병원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는 할머니를 보면 수납창구에서부터 친절하게 모셔다드리거나 설명을 자세히 해드리기도 한다.
이따금 나는 못난이 상추며 깻잎, 호박잎, 고추 등을 자판대에 깔아놓고 도심에서 파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쓰윽 훝어보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싶으면 옆에 살짝 앉아 말한다.
"이거 다 파시면 집에 가실 수 있으세요?"
내 말을 기이하게 듣는 이도 있고, 그 의미를 빨리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워하는 이도 있다.
그럴때면 나는 환하게 웃으며 사정없이 별볼거 없는 플렉스를 한다.
"이거 다 저한테 다 싸주세요!"
한번은 병원을 갔다오는 길이었는데 머리카락이 흩날려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병원 앞에 자판대라고 할 수도 없는 갈색 바구니 몇개에 고추며 상추를 까만 비닐봉투에 담아 팔고 있던 할머니가 바람에 날려가는 봉지와 상추를 주워 담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몸은 무척 안 좋은 상태였지만 저 멀리 날아가는 상추며 봉지를 주워다 할머니께 갖다 드리자, "고맙소"라며 내 손을 잡으시는 것이다.
그 손이 거칠고도 차가워서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물었다.
"할머니, 이거 다 싸주세요. 얼마에요?"
"바람에 날아가고 주운거라 다 못쓰게 되었어. 도저히 팔수가 없네."
"그냥 다 주세요. 저 이런 어린 상추 좋아해요. "
몇번을 거절하던 할머니는 내 고집에 말도 안되는 액수를 제시하며 주섬주섬 싸주셨다. 옆의 고추도 같이.
"고마워요."
할머니가 떠나가는 내 뒷통수에 대고 조그맣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저녁, 집에 쌈장에 못난이 상추(여기저기 다 찢겨진)를 먹으라고 내놓은 내게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다.
"또 할머니 상추 샀어? 이번엔 왜이렇게 다 찢어진거야?"
남편도 찢어진 상추를 보고 척 알아챘을 것이다.
평소 나는 식탁에 좋은 재료를 내놓는 편이었으니.
지난 휴가를 갔다가 인근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마침 블로그에서 봤던 유명맛집의 튀김에 길게 줄이 서 있어 남편과 딸에게 줄서라고 부탁을 한 후 시장을 한바퀴 돌고 있었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였을까.
이미 더위에 시들어버린 호박잎과 꽈리고추를 주섬주섬 싸고 있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보였다.
낡은 소쿠리에 담긴 시들어버린 호박잎을 비닐봉투에 다시 담는 할머니의 거칠고 굽은 손가락.
순간 눈물버튼 작동.
"할머니, 집에 가시는거에요?"
"아, 예. 그런데 왜요? 뭐 사시게?"
"여기 소쿠리에 있는 호박잎 다 주세요."
"이거 너무 양이 많은데. 혼자 다 못 먹어."
"그냥 이거 다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너무 많은데 하면서 세봉다리를 비닐봉투에 꾹꾹 눌러담으셨다.
"이거 내일 집에 갈건데 안 상할까요?"
"시원한데 둬야해."
"이거 다 얼마에요?"
"다 못 팔고 갈거였으니까 8천원에 줘요."
만원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돈을 찾으려고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런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급하게 도망쳤다.
"괜찮아요. 할머니. 날씨도 더우신데 얼른 집에 가세요."
내 뒷통수에 대고 할머니가 소리를 치신다.
"아이고 고마워라. 다들 깎으려고만 하는데 색시같이 돈을 얹혀주는 사람은 난생 처음 보네. 진짜 고마워요!"
줄 서 있던 남편이 검정 비닐봉투를 주렁주렁 들고 오는 나를 멀찍이서 보고 웃기 시작했다.
평소 이렇게 시장에서 장을 보는 스타일이 아닌데 이렇게나 쓸어온 것은 분명 그 이유일테니까.
고이고이 모셔서 호텔까지 들고가서 다음날 집에 오자마자 찜기에 찌려고 보니 반 이상이 상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했다.
저녁밥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남편이 잘 삶아진 호박잎을 보며 한번 더 웃는다.
"맛있나?"
"당연히 세상 맛있지. 할머니 정성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