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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형 Jun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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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

92kg의 몸으로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는 미친 남자

 

 도봉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나는 "산이 그래 봤자 산이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처음 관악산에 올랐다.

새해가 밝고 며칠 지나지 않은 2021년 1월 3일이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바른체육관 선수부와 트레일 러닝을 하기로 약속해놓고 포스를 신고 왔던 내 잘못도 있었지만 비루해진 나의 몸뚱이는 더 이상 도봉산을 뛰어다니던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러닝은 커녕 걸어서 올라가기도 버거워 허리를 부여잡고 몇 번을 쉬었고 "진짜 더 이상은 못 가겠다."라고 머릿속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올 때쯤 연주대에 도착했다.


 부끄럽지만 바디프로필도 찍었고 러닝으론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는데 불과 2달 만에 이런 저질 체력으로 변해버린 지금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함께 산을 올랐던 동료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 젊은 친구가 이렇게 체력이 약해서 쓰나."


아마 다른 일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을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는 아니었다.

빨리 달리는 건 몰라도 끝까지 달리는 건 자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못하게 되자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아 유튜브에서 '긴벌레'라는 유튜버가 올리는 영상을 보게 됐다.

그는 2021년 1월부터 풀업을 하기 위해 '매일' 풀업 밴드를 사용하거나 보강운동을 하는 영상을 찍어 올렸다.

 간혹 웃긴 영상도 올렸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다이어트 혹은 풀업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모습과

'스터디코드'의 조남호 코치가 수험생활 내내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했다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아 '매일' 달리기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마라토너의 바이블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출저 문학사상>


 세계적인 일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원고 작업을 하며 매일 10km 달린다는 콘텐츠가 SNS에 그의 책과 함께 카드 뉴스 형태로 올라오는걸 종종 본 적이 있었고 그 책을 찾아 바로 주문했다.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 있었지만 나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의 정신에 매료되어 몸상태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92kg의 육중한 몸으로

2021년 2월 1일부터 매일 5km를 달리면서 그걸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뒤바뀐 순간이었다.


쉽게 싫증을 내기 때문에 무언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없는 나도

대학교를 박차고 나와 회사에선 퇴사를 밥먹듯이 하는 튀어나온 못인 나도

마음만 먹으면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래야 버틸 수 있었다.

벼랑 끝에 서서 하루 종일 모든 걸 실패하더라도 매일 달리는 것만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2021년 총 결산

2월 말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10km를 뛰었고 48분이라는 나쁘지 않은 첫 Personal Best(PB)를 세웠다.

더욱 잘 달리기 위해, 부상 방지 차원에서 좋은 장비를 구매했고 4월부터는 매일 10km를 달릴 수 있게 됐다.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병행하여 혹독하게 훈련했었던 여름이 지나자

10월에는 드디어 40분의 벽을 깨고 10km를 39분에 완주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어느덧 활동하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어느새 제법 잘 달리는 축에 속하게 됐고,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것을 보면 마라톤에 충분히 재능이 있다는 말을 종종 들으니

평생 남의 일처럼 느껴지던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목표인 서브 3(3시간 이내 풀코스 완주)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10km를 달렸다.


11월 손기정 풀코스 마라톤 오프라인 대회만 바라보며 준비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아쉽게도 무산됐다.

그동안 준비해온 것이 아까워 첫 풀코스를 잠실 종합운동경기장 보조 트랙에서 뛰었는데

400m 트랙 105바퀴 반을 뛰어 3시간 16분으로 풀코스 마라톤 싱글(풀코스 3시간 10분 완주)은 실패했다.

에어팟 방전이나 역풍으로 인하여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컨디션은 최고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풀코스 마라톤에 대한 회고는 나중에 더욱 자세히 작성할 생각이다.


지금도 여전히 10km를 매일 달리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

요즘은 거리 상관없이 여유가 있거나 달리고 싶을 때 달리는 편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내가 거의 매일 10km를 달려왔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지금의 나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쓸 글이 누군가에겐 시작이 되고 누군가에겐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내 발자취를 추억하면서 다시 매일 10km를 달리던 미친 남자가 되기 위해 글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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