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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 타인의 빛

by 청사

미는 시대성을 담고 있다. 미는 과거로도 의미가 있지만 현재에 적용되거나 기능할 때 가치가 더욱 크다. 미는 우리 시대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커다랗고 견고한 감옥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치유하거나 희망을 담아내는 해방구가 된다는 점에서 방치하거나 등한시할 수 없다.

홋카이도 여행을 마치면서 머릿속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축적되었다거나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일본적인 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많은 것을 얻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쉬움이 많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다만 여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달라붙었던 몽롱해진 미를 정리하고 싶었다.

가와바타 야스니리(川端康成)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 (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 美しい日本の私)에서 서양과 다른 일본의 미의식을 도원의 와가(道元の和歌), 명상에 기초한 선(禪)의 정신 등으로 소개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해서 칼을 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존재하게 하는 미이다. 즉


“우리는 동양의 허무와 무를 가지고 있다. 나의 작품은 그 허무의 작품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의 허무주의(nihilism)라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토대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겐(道元, 가마구라시대 선승, 조동종의 창시자)은 사계에 대한 자신의 시를 ‘선천적인 실체(Innate Reality)’라고 명명했고, 더욱이 선(禪)에 깊숙이 빠져 사계의 미를 칭송했다.”(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아름다운 일본의 나」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일본적인 미는 사념이 없는 청정의 미이다. 선에 의해 무로 가는 시작이 있지만 결코 끝이 없는 여정이다. 수양에서 오는 것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하얀 마음이다. 욕심을 부려 취하려 해도 담아지거나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격렬하지만 울퉁불퉁한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 평화로운 미이다.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애매한 일본의 나」 (Japan, the Ambiguous, and Myself, あいまいな日本の私)에서 과격하면서도 희망이 있는 일본적인 미를 칭송했다. 그것은 존재를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애매한’(vague)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통해서 존재를 볼 수 있는 ‘양의적(Ambiguous)’것이다. 즉

‘예술의 아름다운 치유의 힘을 믿고 있는 근거를 발견했다. 나의 믿음은 완전하게 증명되지 않았다.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나약한 사람’일지라도, 기술과 교통의 무시무시한 발전의 결과로 20세기를 통해 축적된 모든 잘못들을 심드렁하니 받아내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할지 방법을 찾고 싶어 하는 이 세계에서 주변적이며, 미미하며,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인 사람으로서, 기대하는 것은 겸손과 친절함으로 대응하는 인간적인 기여로, 인류가 화해하고 치유되기를 바란다.’(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애매한 일본의 나」에서)

오오에 겐자부로는 인간의 문명 세계가 과학이나 기술에 의한 발전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류라는 양의적 사회로 인식했다. 인간계에는 빠름과 느림,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 온전한 사람과 불안한 사람 등으로 균열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류를 숨길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들여 치유하고 새롭게 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겸손과 친절함으로 말이다.

문명은 발전과 오류를 양산하여 진실이 갈라지고 평화가 깨짐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화목을 추구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흑과 백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양의적인(Ambiguous)’ 신비로운 중용의 미가 있다. 그것이 존재를 치유하고 화해하게 하는 일본적인 미학이다.

만약 일본인이 아닌 내가 일본적인 미에 대해서 말한다면, ‘회색의 일본과 나’(Japan, The gray and Myself, 灰色の日本と私)라고 축약해서 말하고 싶다. 그것은 논리적인 근거나 증명할 수 있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도출이 아니라 즉흥적인 감성과 감각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회색(灰色)은 고대영어 ‘gher’에서 유래했고, ‘은근하게 반짝이는 빛’을 뜻한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검정과 하양이 섞였을 때 보이는 색을 상징한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서는 이념을 색으로 표현했는데 사상적 경향이 없는 사람들은 ‘회색’으로 분류했다. 회색은 늘 자신을 주위에 맞추기에 얼마나 밝은지 얼마나 어두운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변의 빛에 의해서 달라진다.

내가 ‘The gray’를 선택한 이유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슬픔과 기쁨, 자신과 타인, 가족과 이웃, 강자와 약자로 파열음이 난무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굴하지 않으며 목매지 않고 감정이 상처 나지 않게 절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다가오는 다름을 들춰내어 생기는 충동과 분열 대신에 공존과 조화를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어느 작가는 친일청산이나 친일현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유학한 친일파가 많다느니, 일본에 유학하면 친일파가 된다느니’하는 말을 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어쨌든 일본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교수님은 친일파입니까?’라는 추궁에 직면에 한 적이 있다.

타인의 언설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부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 느낌이나 인식은 그들의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빛에 의해 달라지는 세상에서 당분간 기다림의 미학에 기대볼 생각이다. 일본을 살린 ‘일본적인 미’가 한일간의 어둠을 치유하고 동행하는 아름다운 날이 오기를 바라는 친한파’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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