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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 나는 천국을 봤다

by 청사

이 세상이 천국일까? 이승에는 천국이 없는 것일까? 천국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차라리 오래오래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을 때 가든지,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빨리 심판을 받아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가끔 눈을 감으면, 언젠가 깊숙하게 마음을 헤집고 간 인연 일도 없는 사람이 떠오를 때 천국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교 시절 음악 시간에 잘한다는 칭찬에 촌스럽게 열창하며 추억으로 남아있던 소렌토(Sorrento)로 여행을 이어갔다. 행정적으로 소렌토는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광역시에 있는 코무네(Comune)이다. 감정적으로는 마음을 호되게 긁어놓아 많은 상처를 낸 폼페이를 빨리 벗어나 치유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르네상스 최후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궁정시인으로 활동한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십자군과 무슬림 간의 십자군전쟁을 다루면서 동시에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어 유럽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La Gerusalemme liberata,1580년)을 썼다.

그리고 올리브유와 포도주, 고추의 주산지이고, 레몬과 오렌지가 많이 생산되어 상큼한 맛의 레몬 사탕, 레몬 술, 레몬 비누 등의 향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의 가사에는 소렌토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향기와 인간적인 향수가 있다. 나는 낭떠러지 담벼락에 기대어 푸르른 나폴리 항을 바라보면서 무심코 가사를 조용히 읊었다.


“바다를 봐, 얼마나 아름다운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마치 너를 생각하는 이로 하여금 깨어 있을 때도 꿈꾸게 하는 너처럼. 이 정원을 바라봐 오렌지 꽃향기를 느껴봐, 너무나 훌륭한 향, 마음으로 바로 파고들지. 이 소렌토의 바다를 봐, 보물을 품고 있지, 온 세상을 여행한 사람도 이런 바다를 본 적은 없을 거야. 이 인어들을 봐, 네게 매혹되어 바라보고 너를 너무나 사랑해 네게 입 맞추고 싶어 해. (후렴) 그런데 너는 ‘나는 떠나 안녕’이라 말하지, 이 사랑의 땅에서 멀어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니. 하지만 날 떠나지 말아 줘, 내게 이런 고통을 주지 말아 줘, 소렌토로 돌아와 줘 날 살게 해 줘”


지옥에서 탈출하면서 다시는 그런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이 통했는지 인간적인 정이 넘치고, 아름다움이 있고, 연인 간의 사랑이 있고, 간절한 소망이 있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바람이 있는 감성의 도시 소렌토에 와서 인간다운 맛에 심신을 흠뻑 적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떠나 안녕’이라고 말한 님처럼 떠나야 하는 곳이었다.

상큼한 레몬 사탕을 입에 물고 마무리하는 소렌토와의 이별은 자연의 향연을 담고 기다리고 있는 나폴리(Napoli)항과 조우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채워졌다. 나폴리로 향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멀리서 안개를 헤집고 다가오는 바다를 실눈으로 봤다. 수평선 위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푸르른 하늘과 희석되지 않을 것 같은 파란 바다가 서로를 붙잡고 반가운 눈 마주침을 했다.

옛 왕조 간에 벌어졌던 혈투도 깨끗하게 치유되었고, 시칠리아의 왕이 된 샤롤 1세(Charles Ier d'Anjou)의 명령으로 지어진 누오보 성(Castel Nuovo)도 고상함을 간직한 채 역사로 버티고 있다. 낭만과 품위를 가졌던 산카를로 극장(San Carlo Theatre)은 관록으로 두꺼워진 품위를 자랑했다. 흑인과 백인이 그리고 고전과 현대가 손을 잡고 공존하는 그런 평화로운 곳이었다.

나폴리의 요리로는 지역적 재료와 특성을 잘 살린 음식, 오랫동안 나폴리를 지배한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올리브 요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폴리에 주둔한 미군들이 전 세계로 퍼트린 피자가 있다.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탈리아 요리이지만 본고장에 왔으니 먹어볼 생각이다.

평소 먹방을 즐겼던 피자와 스파게티, 토르타노(Tortano), 모차렐라 치즈(Mozzarella Cheese), 파스티에라(Pastiera), 바바(Baba) 등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특히 단순한 소재를 좋아한 마르게리타 왕비(Queen Margherita)의 이름을 딴 마르게리타 피자가 생각나 사냥에 나섰다.

피자의 도핑과 같은 나폴리의 품속으로 들어와 보니, 잔잔한 파고는 격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쓰다듬고 있었고, 높은 하늘은 맑은 희망을 뿌리고 있었고, 비행하는 갈매기는 새하얀 몸체로 평화를 노래했고, 오가며 마주치는 수줍은 눈빛들은 빈 가슴을 꽉꽉 알차게 채워줬다. 여기저기에는 오로지 기쁨과 진리로 물든 일곱 색깔의 생명이 차고 넘쳤다.

지상의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두둥실 부양하는 생명이 주저리주저리 내 안에 있음을 인식했다. 그것은 분명 꿈같은 한 장면이었으리니! 짧은 여정에서 거친 비극이 있는 폼페이의 무관용은 지옥을, 땅과 바다로 평온하게 인간다움을 보듬는 소렌토의 위로는 연옥을, 꺼지지 않는 파란 생명이 있는 나폴리의 환희는 천국의 맛을 보여주는 듯했다.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의자에 기대니 밝고 포근한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정없이 들이닥친 버거운 기운과 우호적인 기운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검게 식어버린 삶의 잔상이 지평선을 넘어 새파란 물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홀가분했다. 이윽고 잔잔한 바다 위에서 싱싱한 얼굴로 살랑거리는 아씨를 닮은 돛들이 사뿐히 인사를 하며 타라고 손짓을 했다. 무심코 배에 오르려는 순간 ‘아악!’, 평생을 동행하고 있는 여인이 어깨를 두드리며 ‘대낮에 무슨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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