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가진 자가 질투하고 갖지 못한 자가 부러워하는 부(富)를 갖는 것이다. 거미줄에서 평화롭게 유영할 수 있는 마음이다. 거미에게 먹힐 걱정 없이 거미줄이 끈끈하고 촘촘하게 몸을 지탱해 줘 행복한 일탈이 가능한 공간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다. 책임으로부터의 해방, 바람처럼 흘러갈 수 있는 여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지배,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매달 조건 없이 들어오는 현금, 일상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감성, 갖거나 갖지 않아도 되는 욕망, 그래도 세상과 틀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즐거운 오늘이 진행되고 밝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삶이다. 부는 갖고 있지 않다면 찾아야 하고, 갖고 있다면 잘 지켜야 한다. 눈앞에 펼친 두바이는 부를 찾아 성장을 통해 지키고 있는 크리크의 기적(Khūr Miracle; Creek Miracle)이 일어난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바이의 중심에는 막퉁 가문이 있다. 두바이를 통치하는 막툼 가문과 아부다비를 통치하는 나히얀(Al Nahyan) 가문의 뿌리는 바니야스(Baniyas)부족이다. 그 부족은 리와 오아시스 사막에 기반을 두다가 아부다비로 이동했고, 그중 일부 가문은 두바이에 정착했다. 두바이의 통치 가문인 알 막툼(Al Maktoum)왕가는 바니야스 부족의 한 분파인 알 부 팔라사(Al Bu Falasah)부족이다. 두바이는 1833년 아부다비의 통치로부터 벗어난 후 영국의 보호를 받는 독립적인 토후국이 되었다. 1947년 두바이와 아부다비 사이에 북쪽 영토를 둘러싸고 국경 분쟁이 일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9년 영국의 중재하에서 라스 하시안 해안의 동남쪽에 완충 지대가 설정되어 전쟁은 임시 휴전되었다. 1959년 두바이 창시자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Rashid bin Saeed Al Maktoum)이 집권했다. 1971년 UAE가 건국된 후에도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다가 1979년에 합의했고, 199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사 통합이 이루어졌다.
두바이가 창출한 부는 유전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고, 성장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더욱 견고하게 지켜지고 있다. 아부다비는 전체 석유 매장량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두바이는 4%에 불과하다. 두바이 통치자 라시드는 석유탐사권을 콘티넨탈 석유 회사(Continental Oil Company, Conoco)에 주었고, 1966년 파테흐(Fateh) 유전을 발견해서 1969년 원유를 처음 수출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설립된 두바이석유회사(Dubai Petroleum Company)는 1966년 해안 유전을 발견하면서 두바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두바이에서는 1966년 파테흐, 1970년 사우스웨스트 파테흐(South-West Fateh), 1972년 팔라흐(Falah), 1973년 라시드(Rashid), 2010년 잘릴라(Jalilah) 등 5개 유전이 가동되었다. 두바이 페트롤리엄(Dubai Petroleum)은 해상 유전을 운영하고 동시에 두바이 정부소유의 석유 및 가스 탐사, 생산을 맡았다. 그리고 2006년 왕실법령에 근거해서 설립된 두바이 석유 시설(DPE: Dubai Petroleum Establishment)은 두바이의 석유 및 가스 자산 관리를 전담하였고, 2007년 콘티넨탈 석유회사(Conoco Phillips)로부터 유전과 관련된 통제권을 인수했다. 석유산업은 크리크의 기적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두바이가 세계적인 다목적 도시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아부다비의 알 나히얀(Al Nahyan) 왕가가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직을 독점하고, 두바이 알 막툼 왕가는 아랍에미리트의 부통령 및 국방부장관을 독점하고 있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 의회 40석 중 8석을 차지하고, 라스 알카이마 토후국과 함께 독자적인 사법권을 가지고 있다. 막툼 빈 부티(Maktoum bin Buti, 1833~1852)는 두바이에 정착한 막툼 가문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아미르가 되었다. 막툼 빈 부티를 계승한 사이드(Saeed bin Al Maktoum, 1912년~1958년)가 통치를 승계하였고, 그 왕위를 승계한 라시드(Rashid bin Saeed Al Maktoum, 1958년~1990년)는 아랍에미리트 연방창설을 주도했으며 두바이의 성장기반을 마련했다. 뒤를 이은 막툼(Maktoum bin Rashid Al Maktoum, 1990년~2006년)은 두바이 개발과 성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현재 통치자 무함마드(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2006년~현재)는 두바이의 아미르가 되면서 아랍에미리트의 부통령 겸 총리가 되었다. 두바이의 왕위 계승은 알 막툼 가문의 전통과 통치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다. 현재 왕세자로 지명된 함단(Hamdan bin Mohammed Al Maktoum)이 다음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두바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시드는 두바이의 인프라구축과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1963년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전통적으로 바닷물이 유입되어 무역과 운송에 이용된 천연 염수 바다 두바이 크리크(Khūr Dubayy)의 준설을 통해서 대형 선박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는 등 크리크의 기적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유전 수출로 획득한 석유자금으로 학교, 병원, 도로 등 사회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여 국가시스템을 완성해 갔다. 특히 세계 경제가 석유 의존을 탈피할 시기를 대비해 경제의 다각화를 시도하여 두바이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어 라시드의 첫째 아들 막툼(Maktoum bin Rashid, 1990~2006)은 동생인 무함마드와 함께 두바이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2006년 1월 4일 막툼을 이은 무함마드는 두바이의 통치자, 두바이의 CEO, 그리고 UAE의 부통령, 총리, 국방장관 등을 맡고 있다.
무함마드의 통치 업적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아랍에미리트 항공사를 설립했다. 바레인의 국영 항공사 걸프 에어(Gulf Air)가 두바이로 가는 서비스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 무함마드는 1985년 3월 영국의 사업가 모리스 플래너건(Maurice Flanagan)에게 에미레이트 항공사(Emirates Airline)를 설립하는 임무를 맡겼다. 에미레이트 항공사는 두바이 왕실의 자금 지원과 파키스탄 국제 항공에서 제공한 항공기 두 대로 시작했다. 1985년 10월 25일 첫 비행이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그의 삼촌인 아메드(Ahmed bin Saeed Al Maktoum)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설비투자와 시설확장을 단행하였다. 에미레이트 항공사는 정부가 소유한 에미레이트 그룹의 자회사이다. 현재는 두바이 국제공항 터미널을 중심으로 250대 정도의 항공기로 6개 대륙, 80개국, 150개 도시로 운항하는 중동 최대 항공사로 성장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의 귀재로 불린 무함마드는 부동산 개발을 통해서 부를 창출하였다. 두바이 법률은, 막퉁 가문이 두바이의 토지를 소유하고 개발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초대형 부동산개발사업에 착수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했다.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제정하여 부동산 붐을 일으켰다. 두바이 서부에 있는 마리나, 주메이라 레이크 타워스, 주메이라 비치 레지던스, 인공 섬 팜 주메이라, 랜드마크 호텔 버즈 알 아랍 등을 개발했다. 팜 아일랜드는 인공 섬 4개를 야자수잎 모양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더월드는 인공 섬들을 세계지도 모양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섬은 구입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저 20미터 수중에 하이드로폴리스 호텔도 건설했다. 특히 두바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그것과 연계시켜 쇼핑과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두바이 몰(Dubai Mall)을 건설해서 미래 도시로 성장시켰다. 두바이는 세계적인 마천루도시, 쇼핑과 레저 도시, 관광과 비즈니스 도시, 과학기술도시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3년 두바이의 국내총생산(GDP)은 4,290억 디르함(약 1,167억 7,900만 달러)이며, 그중에서 비석유산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중계무역 거점을 조성하기 위해 최적의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업이 쟈벨 알리 자유무역지대(Jebel Ali Free Zone, JAFZ) 설정이었다. JAFZ는 1985년 설치된 중동 최초의 경제특구로 쟈벨 알리 항구의 배후지역에 위치해 있다. 중동 인근 국가,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연계하는 중계무역의 거점을 지향하고 있다. 그 지역에서는 무 세금, 무제한 외환거래, 무 노동쟁의, 무 스폰서 등 4 무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USA에서는 외국기업의 소유권을 49%를 인정하는 스폰서제도를 실시하는 반면, 두바이 자유무역지대에서는 100%를 인정하는 무 스폰서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두바이 정부는 1996년 3월 장기적인 21세기 두바이전략발전 계획(Dubai Strategic Development Plan 1996~2000 Into The 21st Century)을 수립하여 석유 의존 경제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국가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
또한 무함마드는 21세기 지식산업의 거점을 구축하고 있다. 1996년 지식산업 환경조성과 정보산업의 세계적 허브를 지향해 기술과 미디어 자유지역(Technology And Media Free Zone)을 설정하였다. 정보 기술 및 비즈니스 파크로서 두바이 인터넷 시티((Dubai Internet City, DIC)를 구축하는 것이다. 1999년 10월에 설립된 두바이 인터넷 시티는 셰이크 자이드 로드(Sheikh Zayed Road)에 위치해 있고, 두바이 마리나, 주메이라 비치 레지던스, 팜 주메이라 등에 인접해 있다. 두바이 인터넷 시티는 기업에 장기 임대, 완전한 소유권 인정, 정부 서비스에 대한 빠른 접근성 등을 제공하면서 2000년 10월 당시 100개 회사가 입주하여 약 15,000명이 근무하는 지식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2019년 DIC는 1,600개 이상의 회사를 수용하고 있으며 아랍 미디어의 주요 디지털 콘텐츠 생성기지가 되었다. 인터넷 시티는 e-비즈니스와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 산업의 허브와 정보기술(IT) 기지로 조성되고 있다. 여기에는 Facebook, Dell, LinkedIn, Google, Intel, Huawei, Samsung, SAP, Microsoft, IBM, Oracle Corporatio, Tata Consultancy, 3M, Sun Microsystem, Cisco, HP, Nokia, Cognizant, Accenture, Hisense 등과 같은 글로벌 정보 기술 회사가 입주해 있다. DIC활성화를 위해서 법률로 50년 동안 모든 세금 및 관세를 면제하고, 자유 경제 구역에서는 100% 외국 소유권을 허용했다. 2000년 11월에는 DIC와 같은 곳에 위치한 콘텐츠 및 미디어 제작을 위한 미디어 시티(Media City), 인터넷시티, 고급 인력을 제공하는 지식 마을(Dubai Knowledge Park) 등을 구축해서 협력하고 있다.
두바이 발전의 상징인 크리크의 기적은 현재진행형이다. 석유산업으로 기반을 다진 성장구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탈석유화산업을 통해서 미래지향적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건설 붐, 관광 붐, 부동산 붐, 투자 붐, 정보 붐 등을 통해 명실상부한 중동산업의 허브, 세계 비즈니스 허브, 세계관광지, 휴양도시 등의 위상을 굳혀 부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2023년 ‘D33 경제 어젠다’(Dubai Economic Agenda D33)를 선언하여, 2033년까지 두바이의 경제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세계 3대 도시로 발돋움하며, 외국인 직접 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유치를 증대하고, 혁신 및 기술성장을 촉진시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리고 10년간 1경 원 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글로벌 전시 및 이벤트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2025년 두바이의 석유 의존도는 2% 정도이며, 관광, 무역, 금융, 부동산, 물류, 정보 등 비석유 부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비석유 분야의 대외 무역은 전년 대비 24% 증가했으며, 비에너지 부문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현재 두바이는 비석유의존경제로 성공적으로 전환하고 있어 중동 석유 산유국의 미래지향적 발전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크리크의 기적에는 내외적인 그림자가 동반되고 있다. 두바이가 석유산업 및 탈석유산업의 활성화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전도상국이나 저개발국가 출신의 외국인 근로자가 유입되었다. 2024년 두바이 인구는 약 380만 명이며, 그중 외국인 노동자가 약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인구의 58.50%가 25~44세 연령대의 남성이다. 그리고 두바이 동북쪽에 위치한 인구 180만의 샤르자와 인구 50만 정도인 아지만과의 도시연합이 이루어져 도시인구는 크게 늘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가 전 사회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바이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그들과 어떻게 화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만약 외국인 노동자가 일시에 귀국한다면 두바이 경제는 한순간에 정지되고 사회가 마비 상태에 빠질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외적인 과제로는 두바이와 아부다비 간의 성장 경쟁이 큰 위협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메르스가 만연하면서 두바이에는 빈 건물이 많았고, 부르즈 할리파도 개점휴업 상태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경쟁 토후국 아부다비는 풍부한 석유자금으로 중동의 허브를 선점한 두바이를 추월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부르즈 두바이’(Burj Dubai)를 건설하는데 아부다비 자본이 투입되면서 아부다비 대통령의 이름을 따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두바이 국영 에미레이트 항공사 매수에 실패하면서 아부다비 공항을 대대적으로 개축 확장하였다. 더욱이 호르무즈 해협에 석유 파이프 라인을 만들어 두바이 등 다른 토후국에 타격을 주고 있다. 두바이는 아부다비에 상당한 부채를 지고 있고, 국토 면적도 작아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협력관계에 있지만 성장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동국가 간에 성장을 둘러싼 경쟁이 노골화되고 있다. 두바이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종교적이며 경제적 관계가 복잡해졌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의 수니파의 한 분파인 와하비즘(Salafiyya Wahhābiyya)과 충동하기도 했다.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기반을 둔 이슬람 극단주의 추종자로 알려졌다. 더욱이 집권한 왕세자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Al Saud)은 중동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개혁 ‘비전 2030’을 선포하여,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중동의 경제 허브를 구축하기 위해 두바이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예로 기업유치 활성화를 위해서 2024년 이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본사나 지사를 두지 않은 기업은 거래할 수 없도록 제도화했다. 정치와 경제 등 각종 영역에서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두바이, 아부다비, 사우디아라비아, 기타 중동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간의 성장, 변화, 경쟁은 어떻게 부(富)를 획득하고 지킬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되고 있다. 두바이가 누리는 부의 가치는 얼마이고 무게는 얼마나 나갈까? 마음으로 누리는 부의 가치와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공식은 없다. 다만 ‘부러워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측정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두바이를 통치하고 있는 막퉁 가문은 ‘질투하고 있다는 고백’을 계속해서 듣기 위한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 전쟁으로 획득하든 투쟁으로 획득하든 부의 본질은 동일하다. 거미에게 잡힐 걱정 없이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자유롭게 거둘 수 있는 삶이다. 두바이가 성취한 크리크의 기적이 도전을 받는 상황을 보면서, 1980년대 민주화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학생 운동의 한 모퉁이에서 투쟁하며 갈망했던 풍요라는 외침이 귓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대한민국이 성취한 한강의 기적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가진 자가 얼마나 질투하는지, 갖지 않은 자가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