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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 ‘멋지다’고 칭찬해

by 청사

시작과 마지막은 숙명이다. 마치 아침과 저녁 같은 관계다.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다. 시작의 시작은 없듯이 마지막의 마지막도 없다. 그러나 시작은 마지막이 있고, 마지막은 시작이 있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시작과 마지막은 그렇게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삶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천혜의 기회이고 횡재다. 그러나 생명은 시작과 마지막이 딱 한 번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게 잘 살아야 한다. 소중하다는 것은 생명이 도중에 중단되거나 속도를 내어 빠르게 당겨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다. 한번 시작한 생명은 연습이 없다. 돌아올 수도 없고 아니라고 돼 물릴 수도 없다. 생명은 딱 한 번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생명이 살아가게 잘 다스리고, 자기의 속도 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 튼실하게 살을 찌우며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황금보다 귀한 이유다.

자유여행을 마치고 팔라조 베르사체(Palazzo Versace) 호텔 로비로 나왔다. 지상의 낙원이나 궁전에서 머문 것 같아 흡족했다. 귀향하는 주인처럼 반겨줬던 샹들리에의 밝은 불빛은 꽃으로 있었고, 돌아가는 회전문은 여전히 품어주고 내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오가는 발길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은 만남과 이별의 뜨거운 순간을 냉정하게 식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만남과 이별은 해도 해도 즐겁고도 슬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낮은 자세로 안아준 의자들은 의젓한 바위처럼 몸체와 마음체를 열고 편안하게 감싸는 본분을 잊지 않고 옹기종기 인사말을 속삭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호텔리어는 다시 오라는 듯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이별의 끈을 고무줄처럼 늘어트렸다. 들어왔기에 다시 나가야 하고, 시작했기에 마지막으로 향하는 순리가 거역할 수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잠시 여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그네가 머무는데 베르사체는 하나의 부족함도 없는, 다시 보고 싶어 별리를 슬퍼하는 여인이었다.

한국을 출국할 때 검은 패션으로 왔기에 귀국 때는 하얀 패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미리 정해놓았었다. 화려하고 깨끗하게 정화된 마음으로 귀국길을 장식하고 싶어 하얀 상의와 하의를 준비했던 것이다. 떠나기 전날 짐을 챙기고 옷을 준비하기 위해서 옷장을 환하게 열었는데 하얀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상의만이 혼자서 짝을 잃었다는 표정이었다.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얀 바지는 옷걸이에서 하얗게 사라졌다. 발이 달려 문밖으로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 헛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 하얀 상하의를 입은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줬기에 그 존재는 확인이 됐다. 그 순간 번개같이 두바이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상이 이 사건으로 표출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국인에 비해 외국인의 노동환경과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바지를 가져갔을 것이라는 매우 위험한 생각을 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어 벌어졌기에 호텔 당국에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는 이유는 없어진 것을 알리면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때 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젊은 청년이 청소도구를 들고 문 앞에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제 당신이 이 방에 들어왔는가?”라고 묻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주 작게 그렇다고 했다. 행방불명된 바지에 대해 물으려고 하자, 아내가 급하게 “말하지 마”라고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와 청년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하자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어색한 공간을 매우기 위해서 큰 타월만 달라고 했다. 복잡한 얼굴을 한 젊은이는 평소에 타월 두 장을 놓고 갔었지만 이번에는 엷은 웃음으로 공손하게 3장을 주었다. 아마도 그 공손함과 덤으로 준 타월에 바지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덕을 쌓아야 한다"고, "이제는 타인과 자신에 대해서 너그럽게 돌아보며 살아도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베르사체 호텔을 나서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달라질 수 있을까? 내 바지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두바이공항에서 만났던 패키지 일행에 합류하여 두바이 프레임(Dubai Frame)으로 향했다. 그 건물은 도시 한복판 자빌 파크에 생뚱맞게 혼자서 찬란한 황금색을 입고 액자처럼 서있었다. 두바이 포르셰 디자인 타워(porsche Design Tower), 두바이 르네상스 타워(Dubai Renaissance Tower)를 설계한 멕시코의 건축가 페르난도 도니스(Fernando Donis)의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150m이고, 양쪽에 93m 타워를 세워 연결한 초대형 액자 모양의 건축물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의무는 아니라고 하면서 사진사가 관람객들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전망대에 오르자 정면에 UAE의 대통령과 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북쪽의 전통지구와 남쪽의 화려한 마천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카이 전망대에 있는 50m 길이의 투명한 유리 다리 스카이 데크(Sky Deck)를 걸으면서 밑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내려오자 두바이의 미래를 구상한 퓨처 존(Future Zone)에서는 하늘을 나는 택시, 해저 가옥, 우주 탐사 등 50년 후 두바이의 모습을 애니메이션과 홀로그래피(holography)로 보여줬다. 기념품 샵에는 입구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있어 기쁜 듯이 구매했다.

이어서 두바이 프레임을 뒤로하고 마디나 슈크(Madinat Souk)로 향했다. 이곳은 현대화된 주메이라(Jumeirah)와 어울리도록 설계된 시장으로 신상품들이 많고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는 비싼 곳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스카프, 공동품, 아랍전통복, 액세서리, 가방, 사치품 등이 있었다. 아내는 화려한 아랍풍의 스카프를 살 생각이었다.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아마추어이지만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장식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 매장에 들어가 보니 매우 화사한 컬러, 부드러운 비단, 현란한 큐빅 등으로 디자인한 스카프가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소성이 있는 스카프였다. 아내는 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점원은 660 디르함이며 정가제이기에 할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세금환불절차는 공항에서 안내를 받으면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망설이는 우리를 보고는 외국인이라 10% 할인할 수 있다는 여지를 뒀다. 아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600 디르함을 내놓았다.

스카프를 안고 이곳에서 가까운 부르즈 알 아랍(Burj Al Arab) 호텔로 향했다. 부르즈 알 아랍은 아랍의 탑이라는 의미이다. 이 건물은 탐 라이트(Tom Wright)가 설계하고, 사이드 칼리(Said Kali) 건설사가 1994년 공사를 시작해 1999년에 개장했으며, 총 38층, 높이 321m, 약 15억 달러가 소요됐다. 페르시아만 해안으로부터 280m 떨어진 인공섬 위에 아라비아의 전통 목선인 다우(dhow)의 돛을 형상화해 지었다. 두바이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현재는 주메이라그룹이 운영하고 있다. 탐 라이트는 부르즈 알 아랍이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나 파리의 에펠탑처럼 두바이의 상징물이 되기를 바랐다고 전한다. 이 건물 28층에 위치한 헬기 이착륙장에서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골프공을 날리고,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와 안드레 아가시가 비공식 이벤트 경기를 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끈 곳이었다.

부르즈 알 아랍은 건축물로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건축을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건설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건축물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그리고 이 건축물의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칭 7성급 호텔이라고 하여 차별화를 자랑하기도 한다. 더욱이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극치의 미를 느끼고 환희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7성급 호텔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라는,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황금과 재물의 포획물 같다는 등의 비판도 있다. 그리고 부르즈 알 아랍은 멋지지만, 끔찍하며, 흥청망청 돈을 쓴, 이슬람식 라스베이거스 같다는 혹평도 있다. 한편, 국내 굴지의 모 회장이 부르즈 알 아랍에 투숙하면서 타사의 TV가 설치된 것을 보고, 자사의 TV를 설치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건물을 보면서 세상은 인간이 추구하는 들뜬 미에 의해서 풍부해지고 맛이 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약간의 욕망, 약간의 사치, 약간의 차별화, 약간의 과장 등처럼 ‘조금 과한 것’이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지지만 끔찍하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멋지다’고 칭찬해 주면 안 될까? 이번 우리의 여행도...

부르즈 알 아랍과 같은 발전된 지역과는 대조적인 전통시장 알 파히디(Al Fahidi) 역사지구로 향했다. 두바이 크릭에 위치한 역사지구는 무역항으로 19세기 중반 두바이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굽이진 골목을 따라 전통옷, 가방, 골동품, 액세서리, 아랍 전통 카펫, 생활용품 등을 파는 상품점이 즐비해 있다. 그리고 각종 문화 행사, 박물관, 아트갤러리, 특별 이벤트, 전통 먹거리 등을 만날 수 있다.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 스타벅스는 만남의 장소나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각 상점 앞에서 서투르고 투박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호객행위를 과하게 하여 약간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카펫 전문점에 들렀다. 화려하고 품위가 있는 카펫이 눈에 들어와 가격을 물으니 기계로 짠 것으로 6,000 디르함이라고 했고, 핸드메이드는 60,000만 디르함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아랍산의 카펫을 살 것이라는 속말을 남기고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가장 관심이 많은 황금시장으로 향했다. 두바이 크릭을 건너기 위해 전통 목선 아브라(Abra)를 탔다. 현재는 수상택시 역할을 하는 아브라는 사각 돛을 단 소형범선으로 무역과 교역, 어업과 운송, 진주채집 등으로 이용되었던 배다. 사방이 뻥 뚫렸고 손잡이도 없으며, 구명조끼도 없이 일행과 함께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쪽과 바깥으로 나눠 승선했다. 약 10분 정도 달리니 아랍전통공예품, 향신료를 파는 스파이스 슈크, 금을 파는 골드 슈크 등이 나왔다. 골드 슈크에는 현란한 불빛과 황금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뤄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을 흔들었다. 유혹하는 사람과 상품에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빠져나왔다. 이어서 전통 아랍 공예품점으로 갔다. 파란색과 금색으로 섬세하게 디자인된 아랍풍의 달라(Dallah) 티 세트를 발견했다. 가격을 물으니 700 디르함이라고 했다. 아내는 적어도 50% 이상을 깎아야 한다는 말을 믿고 300 디르함에 하자고 흥정을 시작했다. 직원은 안된다고 했지만 아내는 다시 250 디르함으로 다시 후려쳤다. 살 의향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직원은 상품을 들고 보스에게 가자고 했다. 보스는 싱글벙글 좋은 인상의 젊은이로 쾌활하게 응대였다. 가격파괴전쟁이 시작됐다. 250 디르함이라는 아내와 300 디르함 이하는 안된다는 보스와의 흥정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이 상황에 몰입되어 있던 패키지 일행 모두가 “해줘라, 해줘라, 해줘라”라고 합창을 했다. 보스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깎아줘라’라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다시 220 디르함으로 내렸다. 보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달러가 있느냐고 묻더니 60달러로 하자고 해서 거래가 성립됐다.

마음에 드는 달라(Dallah) 티 세트를 사면서 일행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간 자유여행과 타인과 동행할 수 있는 패키지여행의 묘미에 흠뻑 젖어 크게 만족했다. 패키지 일행과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두바이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생명에 날개를 달아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비상이었고, 삶의 들이쉼과 내쉼의 흥겨운 춤사위였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두바이를 뒤돌아봤다. 검은색과 희색, 내국인과 외국인, 전통적인 역사지구와 현대적인 마천루, 황금으로 치장한 부와 하얀 바지를 가져가게 했을 빈곤, 현재와 미래, 미와 추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동, 전쟁, 이슬람 등으로 얼룩졌던 이미지가 탈색되어 황금색으로 물든 현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진 흰 바지가 새 주인의 멋을 돋우는 데 기분 좋게 사용되기를 바랐다. 기내식으로 귀국 만찬을 즐긴 후 늘어진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본 그 순간 UAE에 접한 카타르가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심장을 찔렀다. 지금 우리가 날고 있는 하늘은 안전한가? 평화가 칼날 위에서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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