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육체 시장

by 청사


나는 생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을 이어가는 데 힘이 들었다. 생존하는 데 힘이 되었던 좌파 의식의 존재가치가 몹시 흐려진 상태에서 변화는 최고의 미덕이었다. 자존심은 현재의 생명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망상에 불과했다. 어느 사이에 생존 논쟁은 철학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삶에서 이루어졌다. 거대한 사상연구라는 사치에서 벗어나 매우 살벌하고 까다로운 현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이상적인 경제 호황을 의미하는 버블(bubble) 경기가 촉발되면서 각종 시장에는 풍요로움이 판을 쳤다. 길가에 나뒹구는 일본인의 환한 웃음에서는 진짜나 가짜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고, 돈을 쓰고 싶다는 신호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움켜쥔 상품들은 전리품처럼 상처 입은 평화로움의 증거로 보였다.

누구나 이 호경기와 거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을 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구매를 했고 통이 큰 씀씀이가 통했다. 도쿄의 심장부인 신주쿠에는 거세게 밀려 오는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이 스펀지처럼 골목길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런 틈 사이에서 사치와 허세가 재생산되어 범람한 채 사람들을 환희와 혼돈 속으로 빠트렸다. 분명한 것은 그 파티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유독 가혹했던 일자리도 넘쳤고, 점주나 자영업자는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었다. 견고한 조직 생활에 지쳐버린 사회초년생들은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조직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어나왔다. 얼마나 버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자유롭게 노동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근로 현장에는 인력 부족으로 큰 구멍이 생겨나면서 기업사회가 흔들렸다. 역시 그런 흐름은 남의 것이었다.

여전히 보수가 좋으며 품위가 있고 화려한 일(仕事)은 일본인이 독점했다. 노동시장에서 일본인은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노동환경에 힘입어 호사를 누렸다. 대신에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거나 구질구질한 노동은 외국인이 하면 된다는 차별적 노동관도 동시에 정착됐다. 외국인은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 작동하는 먹이사슬에 운명이 놀아났다.

약자로 박제된 외국인은 일본 사회가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노동 관행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박탈되고 있는가를 인식하기를 의도적으로 꺼렸다. 노동 현장에서 일본인과 외국인, 자국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라는 인종적 구분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호소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일본경기 호황을 통해서 아르바이트 찾기에 실패한 사실을 잊거나 자신이 설 자리가 바늘구멍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는 계기와 동기를 찾지 못했다. 노동시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학문을 해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도쿄에서의 현실은 꼭꼭 숨겨 간직해 온 희망의 온도를 싸늘하게 식히고 몸을 움츠리게 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풍요로움이 일상에서 판을 치면서 성 상업화가 시대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네온사인에 기대어 돈을 좇는 불나방을 관능적인 척도로 육체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을 용인하는 비정함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가 되었다. 이성 상대를 욕망으로 관조하고 향유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난 듯했다.

그것의 시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무의식이 하나의 도덕으로 형성되었고, 들어내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무도덕이 하나의 양심으로 질서화되는 듯했다. 도덕과 양심의 변화 속에서 욕망을 화려하게 해결하기 위해 돈으로 신체를 사고 신체를 돈으로 파는 육체 시장이 이미 정당화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제어된 욕망이 있을 뿐 해소되는 욕망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원색적인 성(性) 놀이를 하는데 현실에서 확보한 풍요로움과 준비된 방탕이, 그리고 무자비한 돈과 나약한 육체가 소통하는 기회가 됐다. 거기에는 삶의 논리나 도덕의 논리가 아니라 돈의 논리가 좌지우지했다.

어느 심야방송에서는 여장남자를 지칭하는 오카마(オカマ)가 출연하여 접대한 고객으로부터 받은 롤렉스시계, 벤츠 자동차, 아파트 등을 소개하며 자랑했다. 무슨 대가인지는 거품을 물고 입으로 토하는 흥분된 어투에서 추측할 뿐이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그들의 존재가 풍요로움이나 버블 경기의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매우 정당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성 반란이 아니라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접대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하게 호소했다.

그들을 용인한다는 의미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직업 선택을 하거나 성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서 편견 없이 인정해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미쳐 생각하지도 못했던 젠더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삶을 통해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투쟁을 하고 있었고, 도쿄의 밤 문화 중의 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인식했다. 다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인 성 개념과 질서에 대한 도덕적 시비는 별도로 하더라도 그런 변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매일 드나드는 곳이며, 현란한 빛으로 거리를 수놓은 가부기죠(歌舞伎町一番街)에서는 다양한 삶이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관능적 몸짓이 잘 어울렸고, 진하게 파고드는 불빛으로 몸과 마음을 흠뻑 적시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웠다. 어둠침침하게 숨겨진 욕망이 밖으로 드러나 달궈져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길거리에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야한 생각을 가진 성인(性人)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흔들거리는 눈빛은 성 사냥의 서막이었고, 묵직하게 옮기는 발길은 사냥감을 겨냥하기 위한 화살로 돌변했다. 한밤중에 방향을 잃은 불나방이 불빛에 돌진하듯이 많은 가능성이 있는 돈을 가진 보통 사람이 달아오른 욕망을 태울 곳을 찾았다.

욕망과 돈이 거래되는 시스템이 잘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돈으로 성 사냥이 가능하고, 육체적 학대가 가능하고, 성 탈취가 가능하고, 성적 모욕이 가능한 곳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눈 앞에서 성(性)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동하고 있는 육체 타는 냄새가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성은 돈이 된다.’는 가장 단순한 반대의 논리와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판다.’는 인식과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성을 돈으로 산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개인적인 성도덕이나 성 양심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그것으로 옳고 그름의 답을 내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만 돈과 신체가 거래되는 성도덕과 성질서가 통용되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천태만상의 성문화가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자신감 있게 욕망을 내보여도 흠이 되지 않았다. 긴장된 아랫도리를 해결하기 위해 돈으로 소통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주머니에 나뒹구는 돈을 기꺼이 꺼내려는 허술한 마음이 통했다. 여기에 들어서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어먹은 ‘어머니의 이놈 새끼’라는 푸념 소리도 잊혀졌고, 자신도 모르게 쌓아 올린 도덕이나 양심의 벽이 허점을 보이는 것을 느끼곤 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성 세계를 알 수 있는 위기인지 기회인지 모르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붉은 글씨로 된 노조키(覗き,엿보기)라는 간판이 크게 보였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의미로 해석이 됐지만 망설이다가 동료에게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너도 하고 있잖아!”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감이 안 와. 그렇다면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빠를 거야!”라고 하며 끌고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어둠과 불빛이 깔린 무대에서 관능적으로 몸을 놀리고 있는 무희가 눈 속으로 훅 들어왔다. ‘아 이것이구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진퇴양난이 되고 말았다. 보고도 싶었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에 의지하는 척하면서도 신속하게 그 무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집중해서 꼬나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노조키는 무희의 신체를 뚫어지게 구경하는 쇼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적응하는 데는 도덕적 멈춤이나 비겁한 망설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것이었고, 마음의 흔들림에 대해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반나로 춤을 추고 있는 무희는 마치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곳곳을 적시며 묘한 여운과 향기를 남기고 지나갔다. 역동적으로 공간을 누비는 요염한 자태는 남성들의 사나운 눈빛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적절하게 숨긴 신체는 보일 듯 말 듯 부끄러워하는 새색시 얼굴처럼 세상 밖으로 훌러덩 나오는데 망설이는 듯했다.

무희는 보여줘야 하는 곳과 보여서는 안 되는 곳을 율동과 리듬으로 조절을 했다. 시간이 흘러 수위가 높아지면서 잘 보이는 부분은 내팽개쳐졌고, 새로운 곳을 향해 눈빛과 욕망이 달려갔다. 가끔가다 속 터지는 취객의 탄성은 무희의 가치를 높였다. 그렇게 신체 쇼는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밖으로 주저 없이 불러냈다.

옆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앞뒤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지그시 감은 눈으로 응시를 하면 되었다. 무희가 움직이는 대로 마음과 몸을 맡기면 되었다. 무희의 극도의 자극에 욕망을 맞춰가면 무희와 관객의 교류가 성사되었다. 무념무상을 불러오는 무희의 움직임은 호기심과 욕망의 척도를 무의미하게 했다.

무희의 몸뚱이가 눈앞으로 점점 다가왔다. 급하게 뒷걸음질쳤다.

“형씨 당첨이야. 기회가 왔어!”

“....”

“터치! 터치!”

눈앞에 있는 무희와 대치하면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몸에 손을 대라고 소리로 들렸다. 눈은 무희의 몸으로 가고 있었지만 손가락 마디마디는 얼어붙어 방향을 잃고 있었다.

무희가 정해놓은 유혹으로 관객의 욕망을 폭발시키는 광란의 시간이 된듯했다. 그러나 어떻게 할지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다시 “마네!(money), 마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돈을 주라는 소리였다. 나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주머니에 있는 모두를 꺼냈다.

무희와 나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무희는 천천히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몸에 갖다 댔지만 체온을 느끼지 못했다. 냉정인지 열정인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신체 온도로 있었다는 것만을 알았다. 이성을 잃은 듯이 형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와이파이와 같은 접촉은 어느새 몸의 근육을 극도로 경직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무희는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만지며 붉은 입술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아주 작은 말로 속삭였다.

“좋니? 스케베((助兵衛,호색가)씨!”.

“....”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듯 여유로운 무희의 몸짓은 은밀하게 공포심과 자책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 보기를 외면하는 순간 뚫어지게 보던 무희의 눈빛이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나는 무희의 신체를 엿보기 했고, 무희는 나의 마음을 엿보기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승부가 아니라 완패였다.

마지막 숨겨진 관능적인 속살을 들어내면서 슬픔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희의 눈에는 촉촉함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빈 가슴을 밀도 있게 채워 준 무희의 눈빛은 슬픔이었고, 커다란 무대를 채운 나의 눈빛은 욕망이었다. 공간을 채우는 슬픔과 욕망은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호기심으로 위장한 자유와 본능적으로 발현된 욕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애당초 붉게 쓰인 노조키 간판을 보면서 생긴 망설임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았기에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주위에 걷고 있는 사람들이 노조키 쇼 장에서 달려 나온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의식이 정확하게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무희의 몸체를 봤던 욕망의 눈은 이미 사라지고 눈치를 보는 당당하지 못한 눈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목격되고 있는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따가운 시선이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내달려 겨우 사람이 없는 모퉁이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러나 평범함을 찾아 도망친 평범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머리를 여전히 아프게 했다. 더욱이 여성의 노출을 탐닉하기 위해 돈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왠지 엎어진 물을 담고자 하는 아쉬움이나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반성도 하기 싫었다.

다만, “성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과 돈의 거래는 정당한가? 무희의 은밀한 곳을 보고자 했던 마음은 탐욕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조금 전의 욕망으로 불탔던 내가 갑자기 성인군자처럼 절개 있는 마음으로 해결하지 못할 화두를 꺼내 청승을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외설, 관음증, 도착증, 성 놀이, 성 자유, 섹스, 욕망, 본능, 양심 등 가끔 자신을 움직였던 다양한 용어들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자신의 현 상황을 덥거나 변명해 줄 수 있는 용어가 없었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신체를 상상하면서 가끔 보름달처럼 밀려와 탈출구를 찾던 모습이 오히려 편안했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 손을 뿌리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고 선택한 절제는 욕망이었다. 호기심을 빙자한 자유는 쾌락이었다. 마음대로 한 실행한 본능적 행위는 성놀이였다. 일본인 지인에 의탁한 마음은 나약한 자신이었다. 속마음대로 움직인 것은 내 모습이었다. 내 안에 조용히 있던 자유, 본능, 호기심, 청춘, 마음, 도덕, 양심 등은 비난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결함 많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내 안에서는 자유가 길을 잃으면 욕망이 됐고, 욕망이 길을 잃으면 자유가 됐다. 욕망을 잃은 자유가 꽃을 피우면 선이 됐고, 자유를 잃은 욕망이 꽃을 피우면 악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자유와 욕망은 그렇게 동행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실행에 옮긴 엿보기 행위는 자유이기도 했고 욕망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편적 도덕이라는 잣대로부터 해방되는 성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욕망을 채우기 위해 허용되는 성의 자유는 있는 것일까? 성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성의 자유에 대해서 규정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성의 자유는 성을 평화롭게 하고, 성의 욕망은 성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굳게 믿고 싶었다.

내 앞에는 여러 갈래로 갈 수 있는, 인생의 흔적이 쌓이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공존하는, 삶의 다툼으로 거미줄처럼 인연이 얼룩져지고 있는, 가치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도덕과 비도덕에서 망설이고 있는, 욕망과 자유를 혼동하고 있는, 거친 현실과 예상하기 어려운 미래가 있는 도쿄가 있다.

여기에 살면서 나쁘다고 인식한 경험들이 타인에 의해 자유의 본지가 왜곡됐다는, 편파적 유혹에 일시적으로 빠졌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좋다고 인식한 경험들이 자신에 의해 잘 달린 결과라고 칭찬 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도쿄는 여전히 나의 심장에 남아 희망과 절망을 주고 있고, 애증으로 쌓아가는 성(城)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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