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시대성의 유효기간

by 청사


나를 강하게 묵어놓았던 세계를 해부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과 사고체계를 지배했던 사상의 실체와 현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지식의 성지이며 지식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간다(神田)로 발길을 옮겼다. 지하철의 노선이 겹쳐있어 이정표를 보고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

“간다를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

“저를 따라오세요.”

“같은 방향인가요?”

“아니요. 모르는 것 같아 안내해 드리죠.”

일본인의 다양한 마음이 표출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아르바이트를 거절했던 일본인의 마음과 대조적이어서 놀랐다. 내가 모르던 일본인의 심성을 느끼는 순간이어서 매우 신선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지하철 터널을 빠져나왔다.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지성의 거리에는 단순했다. 소문만큼이나 많은 서점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울긋불긋한 간판이 맞서고 있었다. 서점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날 일이 없다는 듯이 좁은 거리를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몸놀림으로 오고 갔다.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서점의 문은 사상적 대립이나 갈등이 없다는 듯이 활짝 열려있었다. 서점 문 앞에는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이 대세라며 데려가 달라고 웃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기대했거나 관심을 끌 만한 책이 없었기에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은 초점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게 눈처럼 나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어느샌가 포근하게 쾌쾌한 고향 같은 책 냄새가 콧구멍으로 스며들면서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취하고 싶은 냄새는 강도를 더했다.

“그래 이 냄새야. 나를 중독시켜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이 냄새야.”라고 중얼거렸다. 서점 주인은 쾌쾌한 냄새를 내는 책과 닮아 있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제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내가 노리는 것은 중국인 학생을 만나면서 느꼈던 것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되는 좌익 사상을 담은 책이었다.

여전히 기대와 희망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했던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듯이 시야에는 없었다. 내가 반길 수 있는 책이나 나를 반겨줄 수 있는 책은 없는 듯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일상적인 교류, 중국인과 대만인의 커플 충격’이 뇌 속에서 재생되면서 갑자기 눈과 몸이 굳어졌다.

실눈으로 책꽂이의 좌우를 살피는 가운데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구석에 한 권이 꽂혀있었다. 그 순간 간절함을 담은 내 마음이나 구석에 있는 책은 처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찾는 이가 없어 버림받는 것일까? 지성인의 성지로 여길만한 매력이 사라진 것일까? 사상으로서 유효기간이 지난 것일까?’ 온갖 추측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 작은 서점에서는 사상 간의 싸움이 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했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적들이 힘겹게 뒷줄에서 버티기를 했다. 지식인의 눈길을 끄는 서적과 그렇지 않은 서적 사이에 이미 서열이 정해진 듯했다. 사상 간의 서열이 헌 시대를 버리고 새 시대를 불러온 듯했다.

시대성을 담고 표현했던 사상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뜨거운 젊은이의 피를 먹고살았던 좌익사상이 차갑게 식었다. 이미 세파를 흩고 간 죄로 한구석에 숨어있었고, 새로운 시대 흐름이 상처받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지성의 거리로 살아온 간다(神田)의 속살은 사상과 시대의 싸움으로 마구 헤집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양한 색깔로 살아가는 간다를 보면서도 좌익사상의 불용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구석 맨 위에 꽂혀있는 유명한 좌익서적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 책을 볼 수 있을까요?”

“저거요? 에... 20여 년 간 저 책을 보자고 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예?”

“다른 책을 사면 덤으로 드릴 수 있어요.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서점 주인의 한마디에 가슴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서점에서 마르크스(K.Marx.)와 그의 사상은 버릴 수 없어 가지고 있는 쓰레기에 가까운 존재였다. 존재가치와 사용가치가 사라져 공짜로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서점 주인의 말은 사상의 가치뿐 아니라 시대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가늠하기에 충분히 차고 넘쳤다.

몹시 갖고 싶었던 책은 그렇게 오랫동안 버림을 받아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 도쿄에는 죄익사상이 사라졌다. 빛이 바래 보이지 않았고 힘을 잃어 작동하지 않았으며, 매력을 잃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상이 되어버렸다.

간다 현장을 통해서 책을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내용을 보며 지식을 이야기하며, 흐름을 보며 시대를 이야기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책을 보며 절망을 했고, 내용을 보지도 않고 포기했고, 흐름이 부재한 시대를 세차게 버리고 있었다.

사상을 소중히 하고 있는 현실은 사라진 과거가 되었다. 앞으로 다가와야 할 미래는 이미 가치를 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좌익사상에는 과거만 존재했고 현실과 미래는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이 끔찍한 현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난감했다. 현해탄을 건너야 미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건너기 이전부터 망상이었다.

마르크스가 관속으로 들어갔듯이 그의 사상도 관속에 갇히고 말았다. 마음으로 간절하게 소환했던 사상이 사라졌다. 자신을 인도했던 사상이 죽음이라는 굴레로 떨어졌다. 마르크스의 죽음이 그의 삶을 매듭지었듯이, 사상의 죽음이 한 시대와 자신의 미래를 매듭지고 말았다.

나는 사상의 죽음과 시대의 죽음이 신념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치가 떨리도록 전율을 느꼈다. 사상의 죽음은 아무도 그것을 찾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시대의 죽음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념의 죽음은 자신을 지배해 온 목표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에서 벌어진 두 번의 커다란 나의 조난은 상상할 수 없었던 생명줄과 같은 빛으로 반짝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것은 과거에 묶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해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동기가 되고 있었다.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던 좌익사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 반대하고 있는 것, 대결하고 있는 것, 서로 미워하고 있는 것 들로 구성된 투쟁 의식이, 평화의 선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나를 지배해 온 지루한 사상전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려고 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변화라고 말하고 싶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지성의 현장에서 사상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생명의 길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지만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의 간다를 밟아버린 새로운 사상은 무엇일까?’가 궁금해졌다. 언제나 잘 버티고 있는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의 반대편에 평화가 있듯이, 과거의 반대편에 미래가 있듯이, 사상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흔들어버린 반대편에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래버린 지식을 대신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상적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뒷걸음질 치면서 새로운 유효기간을 가진 흐름이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보고 싶다고 충동을 일으킨 것은 간다를 감싸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그것이 간다의 속살까지 울긋불긋 적시고 있었다. 그것은 지성의 논리 위에 있던 간다를 상업 논리와 감성 논리로 새롭고 화려한 궤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알룩달룩한 색깔을 가진 새로운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낯 뜨거운 그림들이 눈을 현혹했다. 입구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매장에는 여인들의 화려한 몸체로 채워져 있었다. 성인용의 DVD, 테이프, 성영화, 성화보, 성잡지, 춘화 등이 당당하게 맞이했다. 성(性)의 성(城)이었다.

새롭게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단어들이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렀다. 러브, 방탕, 환락, 감성, 감각, 욕망, 성놀이, 성의 자유, 섹스 등과 같은 단어들이 풍미했던 사상과 시대를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사상이 본능과 욕망으로 대체되었고, 화려한 감성세계로 전환되고 있는 듯했다.

간다는 그렇게 감성의 시대에 눌려 새로운 호흡을 했다. 자신의 호흡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성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을 채웠다. 성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검푸르고 차가웠다. ‘성의 끝은 쾌락인가 아니면 성의 파멸인가?’라는 성 미래를 상상해 봤다.

자신이 연구해야 할 영역이 ‘이것은 아니야!’ 하면서도 대안이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 이성의 세계에서 감성의 세계로 빠졌듯이 나는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세계는 성의 세계라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감성이 이성을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다를 떠나면서 눈을 감고 좌익시대와 감각 시대를 상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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