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니 제일 낮은 곳의 벗이 되었다. 다시 시작하는 불안함은 다른 곳을 선택하는 새로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시작하면서 생기는 두려움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낯섦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마음과 두렵고도 낯선 상황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리가 떠났다.’는 상실감과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막막함 사이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었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었으나, 그녀가 타인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과거의 인연을 현재의 인연으로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삶은 바라는 대로 살고 싶지만 바라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할수 있는 것은 잠시라도 바라는 대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아침 이슬에 젖은 잡초처럼 다시 살아가야 하는 홀가분한 독신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살면서 쌓아 올린 것들이 불행인지 행복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를 살게 한 이유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뒤를 돌아보면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고 둘이라는 행복함에 젖어 있었다. 혼자라는 편안함과 둘이라는 안달머리를 잊고 있었다. 나에게 강제된 기회가 온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돌아와야 하는 순번과 같은 것이었다. 생이별이 가져다준 기회는 어떻게든 다른 곳을 향하는 동기부여가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도쿄가 차디찬 공기를 내뿜고 있어 숨쉬기가 버거웠다. 다시 한번 숨 고르기를 하다가는 찢어진 생명이 더 거덜날 것같았다. 도쿄는 살아가는 곳이지 쉬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떠나기로 했다. 이른 새벽 마천루 사이에 서있는 고풍스러운 도쿄역은 위용이 있었고, 마치 서울역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온갖 잡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도쿄역(東京駅) 플랫폼 의자에 기대어 아린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순간 거대하고 화려한 신칸센(新幹線)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왔다. 고도성장기의 자부심으로 탄생한 것이었기에 관심이 갔다. 열차가 이렇게 생겨도 되는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차의 이름은 가모메(カモメ)였다. 초롱초롱 두 개의 눈, 하얗고 쭉 뻗은 몸매가 조화를 이루었고 날렵한 날개를 숨기며 비상할 것 같은 갈매기를 꼭 닮았다. 그렇게 비상해 본 적이 없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가모메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칸센은 단순한 열차가 아니라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게 해 줄 구세주였다. 탐승 입구에서는 숙련된 승무원이 손을 모은 채 따듯한 눈빛 인사와 깍듯한 몸짓 인사로 환영을 해주었다. 자리를 찾아 짐을 얻고 가장 편한 자세로 취한 듯이 거만하게 앉았다. 도쿄에서 생긴 어두운 그림자를 싣고 가면서 하나씩 내려놓으면 언젠가는 떨어져 나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삶을 살다가 쌓여 무게로 느끼는 짐은 지나는 역에다 버려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짓누르고 있는 짐을 잠시 내려놓는 것은 다음에 다가올 희망의 보따리를 놓기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 “내게서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짐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희망의 보따리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에 빠졌다.
바람처럼 지나가면서 어떤 역에 내려놓을지, 어느 짐을 내려놓을지 망설였다. 나를 지독하게 아프게 했던 많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순서를 기다리는 듯했다. 상처가 아문 흔적들이 삶을 이어온 영광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소중해졌다. 마음속에는 버릴 것, 맡겨 놓을 것, 내려놓을 것이 없었다. 버리려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 사이에 신칸센은 교토역(京都駅)에 도착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도쿄역과는 다르게 아담하고 운치가 있는 역이어서 놀랐다. 작고 평범해서 나와 잘 어울리는 역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미 마음은 교토로 기울어졌다. 경쟁의 숲과 같았던 도쿄로부터 멀리 있어 안심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교토는 깊고 수수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여기에서는 지인이나 만날 사람도 없어 편했다. 눈길을 둘 곳이 많아 상쾌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가면 걸어지는 자유 공간이어서 흥미가 있었다.
처음의 목적지는 아라쓰키(嵐月) 여관이었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곳으로 마음에 쏙 들어 떠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기에 기대를 한 곳이었다. 황량하게 거칠어진, 태풍이 부는 듯 휘몰아치는 거친 마음을 모두 날려 보내라는 의미로 들렸었다.
이정표가 안내하는 대로 걸어가니 가파른 언덕길에 아카쓰키 여관 간판이 나왔다. 아라쓰키라는 간판은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듯하면서도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거칠면서도 아름다웠다. 마치 달이 바람을 타고 높은 산으로 비상하는 형상을 했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서 달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강림하는 형상을 했다. 아카쓰키 여관은 땅과 하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달의 집이었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는 듯 평화로운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다. 나에게 아라쓰키 여관은 가까이 있어도 접근하기 어렵고 멀리 있으면서도 잡을 것 같았던 이치조 마리를 닮았다.
입구는 전통적인 기와지붕으로 되었고, 안으로는 화려한 정원수와 소나무가 폼나게 굴곡진 자태로 맞이했다. 멋들어진 입구를 지나 하얀 자갈이 깔린 길은 마치 환상으로 가는 길처럼 느꼈다. “천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에 잠시 삶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오카미 상(おかみさん)을 대신한 듯한 직원이 앞마루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상기된 칼칼한 목소리는 이 집과 어울렸다. 거듭된 인사는 ‘손님 대접을 잘 받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것은 도쿄에서 듣던 독촉도 아니었고, 다그치는 채찍도 아니었다.
끝 말미에 떨어지면서 여운을 남기는 낭랑하고 간지러운 목소리는 긴장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소리였고, 마음을 열어도 된다는 속살을 보이는 신호였다. 인사말에 섞여 있는 칼칼함과 부드러움은 고저를 넘나드는 박동 소리를 닮았다. 나는 거칠어진 한낮에 떠있는 어색한 달빛을 보는 듯한 이 분위기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이윽고 여주인인 듯한 오카미 상은 눈 마주침을 남겨놓으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나타났다. 언뜻언뜻 비치고 있는 모습은 아라쓰키 여관이 풍기고 있는 거침과 부드러움에 잘 어울렸다. 하얀 얼굴에 옹기종기 사이좋게 자리 잡은 부드러운 이목구비는 거친 듯 화려한 듯하면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늘색 원단으로 된 키모노(着物)에는 살포지 웃고 있는 화려한 벚꽃이 있었다. 가슴과 허리를 휘감은 커다란 오비(帯)에는 익숙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자세하게 보니 무궁화꽃이었다. 벚꽃과 무궁화로 장식하고 있는 이 키모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오카미 상은 뚫어지게 보고 있는 나의 눈빛을 의식하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방으로 안내를 했다. 사푼사푼 간결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결코 나대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움직임이 아니라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복도를 빈틈없이 꽉 채우는 움직임은 여주인으로서만이 할 수 있는 품격이었고 당당함이었다.
오카미 상의 예절과 자태는 전통적이며 일본적인 정서를 담았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걸어가는 사이에 방에 도달했다. 오카미 상은 방문을 열어주고 다시 무릎을 꿇고 여관의 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말꼬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얼굴과 분위기가 아는 사람과 매우 닮은 듯했다.
오카미 상이 품어내는 미(美)는 아라쓰키 여관이 갖고 있는 미를 함의하고 있었고, 일본적인 정서와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가느다랗지만 굵은 미였고, 작지만 거대한 미였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미였고, 냉정하지만 요염한 미였다.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많은 것을 뜻하는 ‘침묵의 미’였다.
방안 정면에는 해학적인 우키요에(浮世絵)가 거칠게 환영하듯 걸려있었다. 그 아래에는 계절 꽃으로 장식된 꽃꽂이 작품이 차분한 웃음을 내고 있었다. 방 가운데는 빨간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들이 있어 편안함을 주었다. 이 야릇한 곳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한잠을 자고 나서 온천욕을 하기 위해 노천온천(露天風呂)에 들어섰다. 남녀가 따로따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탈의하고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들어가는 순간 남녀혼탕이라는 것을 알았다. 몇 번을 망설이면서 주위를 돌아보다 슬그머니 발을 입수하고 몸을 담갔다. 어둠과 수증기로 뿌옇게 변한 공기 속으로 몇몇 시선이 있었지만 마주치거나 연결되는 시선이 아니어서 숨쉬기가 편했다.
밤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고 달이 내려앉고 있었다. 별빛과 달빛이 내는 팽팽한 긴장감은 마치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긴장감으로 이어졌다. 등불만이 잔잔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을 풀어도 되는지, 몸을 일으켜도 되는지 알 수 없는 신호만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반대편에서 보이는 두툼한 가슴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용한 밤하늘에 흐르는 별빛과 등불은 뜨거운 온천수에 부서져 날아오르는 검붉은 욕망을 비추고 있었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식어버린 욕망이었고, 솟아오르는 수증기는 몸체가 품어내는 야한 마음이었다.
그러다가도 밤기운에 식히기 위해 돌출하는 여인의 몸체는 눈 고르기의 고요함을 깨기도 했다. 온천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은 속세에서 저돌적으로 달려와 부딪치는 냉혹한 긴장감과는 사뭇 달랐다. 온 마음과 몸으로 받아내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새털같이 가벼운 긴장감이었다. 숨 쉬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인간답게 만드는 설렘이었다.
이윽고 여관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홀로 방 안에서 맞이하는 만찬이었기에 타인과의 교감할 수 없었지만 줄지어 나오는 교토의 요리는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먹는 것이 아니라 장인의 손길로 빚어진 예술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온전한 요리를 보는 시선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했다. 색색으로 차려입은 요리에 젓가락으로 과감하게 찢어 입속으로 넣는 행위는 마치 예쁘게 꽃단장을 한 여인을 마구 꾸겨 허물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입속에서 어우러져 씹는 소리는 즐거운 비명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뭉개고 혼자 홀짝이며 내는 흥은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극치의 외로움을 숨기는 의도된 행동이기도 했다. 홀로 된 시간과 공간은 마음을 비워놓고 나는 일생일대 가장 사치스러운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취기를 빙자해서 무엇이든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서빙하던 여성이 나간 후 오카미 상이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오카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품위와 예절로 대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궁금했다.
오카미 상은 “특별히 다케스즈메(竹雀)라는 명품술을 가지고 왔다.”라고 하면서 따듯하게 데우기 시작했다. 돌아보는 그녀를 본 수간 누구인지를 알았다. 기치조지(吉祥寺)에서 ‘짙은 보랏빛 바탕에 선명한 하늘색이 섞인 화려한 스카프’를 남기고 사라진 김 상이었기 때문이다.
화로 위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라 사라지는 다케스즈메가 연출하는 뿌연 김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김 상의 차분한 마음과 같았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김 상을 안다고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과 같았다.
여전히 한정된 인식과 대화가 진행되는 긴장감 속에서도 오카미 상은 빈틈이 없었다. 프로페셔널처럼 자신감이 있었고, 얇은 미소도 잃지 않았다. 그녀가 품어내는 색깔은 잘 숙성된 들판의 벼이삭처럼 짙은 황토색이었다. 확신과 침묵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오카미 상은 잠시 담고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오빠 나야!”
“아... 그래 김 상... 스카프, 알지 알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찾으려 했지만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나도 기회가 있었으면 했어”
“세상에 어디 이런 인연이...”
“세상은 눈 밖에 있고 인연은 마음속에 있어서이지 않을까?”
알면서도 침묵했던 어색함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재회하듯이 보고 보고 또 봤다. 김 상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이미 내가 여관을 예약했을 때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그 이후 줄곧 “설렘 속에서 오기를 기다렸어.”라고 했다.
“오빠가 여관으로 들어오는 순간 숨어서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했어. 오빠이기에 직원들이 알지 못하도록 아는 척을 하지 않았어”라고 했다. 김 상을 만난 사실에 반갑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 순풍을 타고 있는 듯하여 안심했다.
“오빠! 내 스카프 갖고 있어”라고 웃으며 물었다. “응 잘 모셔두고 있어. 아까워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빠! 미안하고 기뻐서 한 잔 드리려고 가지고 왔어, 자 받아” 그녀는 가지고 온 다케스즈메를 잔에 넘치도록 따랐다. 지나온 삶을 나누는 사이에 얼굴은 홍조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그 이후 여기까지 오게 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기치조지를 떠난 후 생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교포가 운영하는 클럽에서 일을 했지요, 그런 가운데 유심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던 예의 바른 와타나베 이치로(渡辺一郎)라는 일본인 남성은 술만 마시면 자신과 ‘인생을 같이 하자.’라고 폭탄선언을 하곤 사라졌어요. 그 이후에도 반복해서 술을 먹으면 고백이 진심이라고 내뱉고는 사라져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고백들이 왠지 자꾸 가슴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와타나베 이치로는 어머니와 함께 반지를 들고 와 청혼을 하였지요. 뭉클하면서도 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조용히 아들의 청혼 장소에 동반한 어머니의 신중함과 간절함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의 말에 믿음이 갔지요. 그것이 인연이 돼서 이렇게...”
그 이후 김 상은 와타나베 이치로의 진실한 사랑 표현에 감동이 되어 결국 부모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아라쓰키 여관이었던 것이다. 띠동갑인 일본인 남자와의 결혼에 대해서 한국 부모님은 반대하였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결혼을 해서 아라쓰키 여관을 이어받아 오카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군인 “와타나베는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 후 지금은 홀로 남아있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로서, 그리고 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서 가업을 잇고 있다.”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아라쓰키 여관을 통해서 일본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응원을 해주었다. 그녀는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당당하게 지시를 하면서도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만났던 어리고 나약해 보였던 김 상이 아니라 성숙한 오카미 상으로 강하게 서있었다.
잔을 주는 틈을 이용해서 “키모노에 있는 벚꽃과 무궁화가 왜 한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부터 일본인 남편을 잊지 않고, 한국인인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라쓰키 여관을 운영하는 한 지금처럼 벚꽃과 무궁화가 그려진 키모노를 입고 손님을 맞이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사이가 되기를 염원하는 의미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 키모노는 자신을 지켜주는 분신이며, 여기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한국과 일본에 대한 애착”이라고 했다.
김 상은 여전히 김 상으로 그리고 와다나베 상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고, 두 신분으로 사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가졌다. 김 상으로서 와타나베는 일본인처럼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과 와다나베로서 김 상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녀 다운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아라쓰키 여관에서 피어난 벚꽃과 무궁화는 한 여인의 미와 운명이었다. 그들 꽃은 키모노를 통해서 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와카나베 상이자 김 상만이 피워낼 수 있는 꽃이었다. 아라쓰키 여관에 찾아드는 낮과 밤은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평화를 찾는 김 상의 것이었다.
그녀 모르게 새벽에 하야시 선생 집에서 도둑놈처럼 도망 나왔던 일, 김 상이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내가 소리 없이 떠났기에 배웅을 해주지 않은 것이 서러웠는지, 아라쓰키 여관의 오카미로서, 김 상과 와다나베로서, 지인으로서 당당하게 나를 배웅을 해줬다.
김 상은 “오빠 내 이름 알아?”라고 말을 했다. 망설이자 “그럴 줄 알았어, 김 행자, 와다나베 사치코.”라고 말을 했다. 한국 이름에 성만 바꿨다는 것을 알았다. 이름처럼 현해탄을 건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에게 아라츠키 여관은 거칠게 다가온 사랑이었고 자부심이었다.
사람과 헤어지면서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마음이 훈훈해졌다. 점점 멀어져 가면서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허전한 나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크게 “사요나라 사치코!”를 외치며 갈 길이 있는 듯이,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이 발길을 옮겼다.
continued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