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위에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닌 듯했다. 행복은 찾아왔을 때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마리는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학교와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경의 대상에서 이야기의 상대로, 남과 여에서 연인으로, 야생화에서 심장에 남는 사람으로 알아 온 그녀가 사라졌다.
새삼스럽게 그녀가 누군 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새빨간 용암처럼 솟아오르던 뜨거움, 빗줄기 하나하나를 골라내는 섬세함, 복잡하게 있는 혼돈을 분해하는 날카로움, 끝없이 참아내는 인내력, 저돌적으로 도전하여 담대함, 한없이 부드럽게 들리는 속삭임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걷는 것이 동행이라고 알려준, 행복 위에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고 강조한, 기다림은 기다리는 자의 몫이라고 이야기했던, 약속은 지켜야 맛이 난다던 말이 그녀의 것이었다. 사라질 것이라는 말도 없이 사라진 사실도 그녀의 것이었다.
그동안 같이 밟고 올랐던 도서관 계단은 비탈길과 다름없이 기울어져 있었고, 헛발을 디뎌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게를 느끼며 걷는 발길이 아니었다. 목적이 있어 가는 길도 아니었다. 앞으로 향해야 할 눈길은 하염없이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찾으며 헤매고 있었다.
마리로 인하여 벌어진 혼란은 아픔의 구덩이로 깊이 파이고 있었고,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흘렸던 조각을 찾아야 했다. 산시로 연못에 나타난 이후 그녀와 동행하면서 귀동냥한 조각을 하나하나 떠올려야 했다.
가끔 ‘집안에 일이 있다.’고 급하게 호출되었을 때 양복을 입은 신사가 데리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마치 경호원이라는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유명 인사에게 있을 법한 그런 상황은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혼자 등교할 때면 노란 스포츠카를 몰고 와 잘 보이지 않는 주차장 구석에 세워두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라는 소문도 무성했었다. 서양인을 닮아 혼혈아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녀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이전에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자신에 대해서 묻거나 찾지 말라”라고 약속을 요구했고, “그렇지만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녀를 찾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유일했다.
그녀가 말한 “그렇지만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약속’의 유효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녀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나 지키는 것 모두 헤어짐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약속을 깨기 위해 그녀가 남긴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다. 가장 유력한 단서는 이치조 마리라는 이름, 어느 날 빼앗아 지갑 속에 간직한 그녀의 사진, 애마였던 시나가와(品川) 자동차 번호판, 아버지가 좋아한 산시로 연못, 찾지 말라는 강요된 약속 등이 전부였다.
도쿄에서 나카무라 상을 찾는 격이었다. 우선 시나가와 라는 지역과 그녀의 사진에 찍힌 대문 찾기에 나섰다. 어딘가에 있을 마리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는 집도 사람도 없었다.
문득 그녀가 흘렸던 대문의 문장이 생각났다. 벚꽃 형상을 한 문장이었다. 벚꽃이 피는 명소를 찾아가듯이 벚꽃 문장이 있는 대문을 찾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세하게 본 벚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대문에 박혀있는 벚꽃을 즐길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벚꽃이었기 때문이다.
문패가 없어 마리의 집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문틈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산시로 연못을 닮은 곳도 찾지 못했다. 뚫어지게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감시 카메라가 경고하듯이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카메라와 눈싸움하면서도 해결책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을 안고 문 앞에 앉았다. 찾아야 한다는 의욕은 뜨거운 햇빛에 달아올라 목구멍을 태웠다. 이윽고 인기척이 들리면서 샛문이 열리며 한 신사가 나와 조용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말을 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성은 어디에선가 봤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가끔 학교에 와서 그녀를 데리고 갔던 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생각에 급하게
“저기 이치조 마...”
“네? 그런 분은 없습니다.”
그 남자는 틈을 주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단호한 말에 다시 뒷걸음질 치기를 하고 말았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녀와 한 약속이 가슴을 강하게 내리쳤기 때문이다.
이윽고 어정쩡한 상태로 있는 상황에서 대문이 열리고 자동차가 안으로 사라졌다. 홀연히 사라진 그녀처럼 미련 없이 자동차도 사라졌다. 마리 행방 찾기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뒤늦은 자각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암울하게 진행될 거절보다는 차라리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망설임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글자가 나를 지배하면서 그녀가 말한 “그렇지만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희석되었다. 그녀가 없는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무료하게 지나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산시로 연못뿐이었다.
생각이 많아질 때 왔던 산시로 연못은 매우 낯설었다. 그러나 눈에 담는 것이 없이 물끄러미 응시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가끔 눈을 감고 있으면, 연못 건너편에 그녀처럼 보이는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녀와의 만남은 멈추고 있었지만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어느 날 산시로 연못에 행복한 순간 의지했던 유난히 빛이 나는 돌부리에 기대어 선잠에 빠졌다. 파노라마처럼 흘러간 삶들이 다시 정체되어 쌓이는 듯한 무게를 느끼다 깨고 말았다. 살며시 연못을 보니 익숙한 물그림자가 잔잔한 물보라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한참 마음을 유혹했던 야생화도, 가끔 야한 광경을 감췄던 버들가지도, 눈독을 들이던 자신의 그림자도 버거웠다. 언제나 허깨비처럼 서 있는 자신의 그림자만이 물살에 의지하며 정신 차리라고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미워도 같이 가는 자신과 그림자가 처량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와 어깨의 부딪침이 있는 듯했다. 지나가는 행인인듯하여 “앗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했다. 이윽고 나지막하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잘 있었어?”
“.....”
너무 놀라서 보니 마리였다. 그녀는 약간 구겨진 웃음으로 이 상황에 대응했다. 구겨진 웃음이 오히려 이 상황에 잘 어울렸다.
“산시로 연못의 기운이 필요해서...”
“.... 응 나도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상처를 덮으려는 듯이 겉으로 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전에 갖고 있었던 완전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연이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입속에는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담고 있는 사연을 풀어내려는 듯이 부풀어 올랐다.
“사실은... 문 앞에 있는 너를 봤어, 시나가와에서...”
“나도 직감으로 알았어. 왜 안 나왔어?”
“네가 한 약속이 깨질까 봐. 나왔으면 약속을 어긴 것이 되잖아.”
“아 약속...”
“그래서 지금 네가 약속을 지킨 거야.”
이 여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안아줘야 할지,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지, 다시는 놓을 수 없다고 매달려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연못 한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으며 “이리 와 앉아, 할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 헤어짐이라는 마지막 장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하고 싶었다.
‘만남은 서먹한 맛, 인연은 스쳐 가는 맛, 사랑은 비켜 가는 맛, 연인은 이별하는 맛’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약속이 이행된 이 순간 지켜야 할 약속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헤어짐을 통해서 자유라는 새로운 날개를 달게 되었다.
그녀는 담아두었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침이 없는 언변과 자신감이 있는 모습이어서 좋았지만 불안했다. 상처받는 말이 쏟아져 나와도 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었듯이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지켜 약속을 없애고 다시는 약속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제품을 생산하는 아카몬(赤門) 주식회사, 그리고 국내외무역을 하는 아카몬 무역회사, 기업합병을 통해 성장시키는 아카몬 투자사 등으로 구성된 아카몬(赤門) 홀딩스의 오너였다.
그중에서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M&A전문회사인 아카몬(赤門) 투자사였다. 이 회사는 미래지향적인 기술을 가진 기업을 매수하여 상장회사로 성장시키는 사업을 했다. 그리고 유망한 기업 간 또는 산업 간의 합병을 통해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사업을 해 왔다.
그와 더불어 아카몬(赤門) 투자사는 사회가 변화하는 가운데 전망이 있는 도시재개발업이나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했다. 신도시 개발사업뿐 아니라 도시로 이동하면서 공동화된 농촌 지역에서 전문경영농장을 개발하는 지역개발사업을 했다.
어머니는 골동품과 미술품 사업에 전념하면서 나름대로 확장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업에 종종 관여하면서 그 업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지식도 풍부하여 사업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곤 했다. 마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갈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이루진 못한 학업의 꿈과 자신의 의지가 일치하여 도다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그 제미에서 우연히 나와 연결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아카몬 투자사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래산업을 선점하기 위해서 합병을 추진했다. 할인 매장 등과 같은 오프라인 판매를 해오는 과정에서 기울어지고 있는 상장사 콘니치(今日) 슈퍼마켓사를 매수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투자금이 없어 곤궁에 처한 온라인판매 전문업체 아시타(明日) 네트워크를 매수하여 온라인매매나 홈쇼핑사업을 활성화하려는 구상이었다.
아카몬 투자사는 콘니치 주식의 33%, 그리고 아시타사 주식의 30%를 각각 취득하고 합병을 추진하였지만 양사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양사는 아카몬 투자사의 기업매수에 대항하기 위해 자본제휴를 목적으로 하는 제삼자 할당증자용의 신주 발생을 결의했다.
신주발행으로 양사에 대한 아카몬 투자사의 지주 비율이 저하되면서 합병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아카몬 투자사는 “기업매수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현저하게 불공정한 방법에 의한 신주 발생은 정지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도쿄지법은 ‘신주 발생이 유리(有利) 발생에 해당되고 불공정발행에 해당된다.’고 판결을 하여 아카몬 투자사의 손을 들어줬다. 도쿄지법의 판결로 아카몬 투자사는 양사의 필두 주주(筆頭株主)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법적으로 지위를 확보하여 병합에 들어가려는 찰나에 경쟁사와 관련된 야쿠자 단체 구로이 파(黒い派)가 개입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경쟁 관계에 있는 야쿠자 집단과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합병하려던 사업이 위기에 빠졌다. 아버지는 경쟁 관계에 있는 구로이 파의 음모로 도쿄지검에 피소를 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는 심복인 아카몬 투자사의 법률 실장이 이 일을 해결하면서 그를 가업 후계자로 낙점했다.
아버지는 가문과 가업을 이를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장래를 위해 결단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장녀인 마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법률 실장과 결혼할 것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치조 마리는 아버지의 요구와 자신의 학업이라는 선택지에서 망설였지만 아버지의 바람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너는 사업을 할 성품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포기했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마리는 아버지와 자신이 바랐던 학업을 중지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하여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아쉬움을 가진 듯했지만 그녀의 성격대로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산시로 연못에서 시작된 만남과 사랑, 그녀와의 약속은 공중 분해되는 상황이 됐다. 산시로가 그랬듯이,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녀도 그래야 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막고 싶었던 산시로의 별리가 제 자리로 찾아가는 듯했다.
그녀는 결혼에 앞서 “그렇지만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지키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운명에 대해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학업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침묵했다. 그녀는 스스로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는 듯했다.
그녀는 “뒤 돌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잘 지내, 산시로 연못 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약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어서 약속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남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되지 못됐다.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놓아주어야 하는 운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길이기에 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깨끗하게 굴복했다. 그리고 나의 희망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희망대로 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리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실바람에 실려 왔다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회오리에 떠밀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그녀가 시작한 산시로 연못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의 ‘바라기’로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한 약속을 산시로 연못을 떠난 적도 없으며 떠날 수도 없는 돌부리에 살짝 얹어놓았다.
continued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