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길목에서 서성이는 미(美)

by 청사

여정을 앞에 두고 숨겨진 매력이 많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어 좋았다. 교토가 내는 고리타분한 냄새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엄습해 오면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생소함’이었다. 다름에서 오는 신선함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무작정 유혹당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느끼는 생소함은 여기에서만 살아가 독특하게 풍기는 신선한 맛과 상통하고 있었다. 교토가 안고 있는 사연, 내뿜고 있는 진한 향기, 심심하고 간절하게 흐르는 기운이 있는 그대로 다가왔다. 그것들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와 담고 있는 아름다움은 일본적인 정체이고 일본적 미(美)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 있는 미(美)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했다. 미는 많은 스펙트럼으로 비치는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좋은 것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는 온화하고, 뜨거우며, 환희이고 관용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가 주는 영감은 부러움이 가득한 가치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미의 세계를 앞에 두고 미의 다른 그림자가 있는 듯했다. 차갑고, 날카롭고, 지독하고, 까다로우며 깊은 고뇌가 서려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품으려 하면 베이고 놓으면 견제해야 하는 비정한 비수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 미는 그렇게 괴팍하게 다가왔다.

미는 세상에서 상대적 가치를 갖는 존재였다. 존재를 극대화하는 호설(好舌)이기도 했고, 무너뜨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독설(毒舌)이기도 했다. 어떤 존재를 살게 하는 뜨거운 희망이기도 했고, 때로는 고사시키는 절망이기도 했다. 미(美)라는 놈은 생과 사를 가르는 아름다운 악마의 성질을 가진듯했다.

미라는 정체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이에 발길은 오랫동안 궁금증을 갖게 했으며, 일본적인 미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금각사(金閣寺)로 향했다.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법호를 따서 로쿠온지(鹿苑寺)라고도 불렸다. 로쿠온지는 아름다움의 혼을 담고 있는지 온통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절로 하라’는 유언대로 절을 세워 금으로 치장하여 ‘금각사’(金閣寺)라고 했다.

금각사를 두르고 있는 아름다운 금빛에는 순수했던 요시미쓰의 마음이 있었고, 쇼군의 냉혹함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요시미쓰는 사라진 싸늘한 주검이 영원히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곳으로 삼고자 하는 염원에서 ‘절로 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겨 혼을 달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칼로 세워지는 것이 선(善)이었고 선정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악이나 악행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깊게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숙명적으로 죽음을 생산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코 죽음을 저주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위로의 대상이고, 산 자는 참회의 대상이라는 진리를 금각사는 통째로 전하고 있었다.

나에게 금각사의 미(美)는 생과 사, 선과 악, 희망과 절망, 깨끗함과 혼탁함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는 역설 그 자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을 하나로 흠뻑 품고 있었다. 인간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욕망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이 만나는 절로 보였기 때문이다.

금각사가 발하는 미는 부드러운 예술품이 아니라 정리(定理)를 거부라는 모습으로 있었다. 거기에는 인간과 자연, 삶과 세상, 생과 사, 추함과 아름다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금빛만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까다로운 인성과 물성을 앞에 두고 잠시 그 세계로 들어갔다.

나에게 금각사는 복잡한 인간의 미를 가지고 있었다. 황금빛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물속으로 비친 황금빛은 인간의 절제를 유도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금각사에는 인간이 키우고 있는 욕망의 미와 도망치려는 절제의 미가 서려 있듯이 양극으로 점철된 모순의 미가 살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모순의 미를 목격해 온 풍경(風磬)은 욕망에 휘둘려 시퍼렇게 변한 슬픔을 위해 울고 있었고, 심한 절제로 가벼워진 영혼의 환희를 바람에 실려 보내고 있었다. 풍경이 내는 슬픔과 환희의 깊이를 알 수 없었으나, 처마 밑의 공간을 우직하게 지키다 변해버린 진한 구릿빛으로 대변했다.

한편에서 오랜 세월을 동거해 온 노송은 세차게 휘날리는 세파를 보듬고 올곧이 버티다가 굽어져 끝내 흘린 눈물을 교코지(鏡湖池)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인내를 담고 있는 교코지(鏡湖池)는 금각사가 빛과 그림자로 저울질당하지 않도록 감싸고 있었다. 금각사와 교코지는 서로 감싸는 연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금각사에 담긴 요시미쓰가 품은 욕망과 절제의 미가 윤회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요시미쓰의 욕망과 절제의 미가 천년이 흘러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품고 있는 생과 사의 미로 윤회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시마는 너무 소중한 금각사의 미(美)를 영원히 살려야 한다는 절박감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금각사의 미는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영원성을 가진 생의 미였고 동시에 사라져야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의 미였다. 그 누구와 공유해서도 안 됐고 그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해도 안 됐다. 더는 그 모습으로 살아서도 안 되며 존재해서도 안 되는 그런 미였다.

그에게 있어서 생을 영원히 살게 하는 방법은 생이 있는 채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생이 다한 존재는 죽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이외엔 영원히 살게 하는 방법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간직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자신만의 절대미였기 때문이다.

사라져도 남아야 하는 미로서 죽어도 죽지 않는 미였다. 금각사의 미는 오로지 생사를 넘나드는 자들의 의해서가 아니라 미시마 자신 안에서 윤회하는 존재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러 마음속에서 실존하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의 마음속에서 허무로 존재하는데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마가 소설 《금각사》 (金閣寺)에서 그려낸 미는 그런 불멸하는 허무의 미였다. 그것은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전체의 미이며 허무로 승화되는 미지의 미였다.

“미는 각 부분의 투쟁이나 모순, 모든 파조(破調)를 총괄해서 그 위에 군림하고 있다. 미는 금각을 싸고 있는 허무의 밤과 동등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미는 세부(細部)이면서 전체이고, 금각이면서 금각을 싸고 있는 밤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나를 괴롭혔던 금각의 미의 불가사의한 것이 해명되었다.... 세부의 미는 그 자체 불안에 충만해 있다. 그것은 완전을 꿈꾸면서도 완결을 알지 못하고, 다음의 미, 미지의 미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예조가 예조로 연결되면서, 하나하나의 그 자체에 존재하는 미의 예조가 금각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러한 예조는 허무의 암시였던 것이다.... 금각의 미는 끝나는 때가 없었다. 그 미는 항상 어디에선가 공명했다.”(《금각사》. 260.)


금각사에 나타난 미는 미시마 유키오에게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존재하면서도 느낄 수 있는 극치의 미이자 동시에 만질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허무의 미였다. 그에게 안착한 허무의 미는 세상의 미였고, 일본적 미였고, 영원한 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시마의 눈을 감게 했던 금각사의 미는 서구적인 탐미주의에 입각한 물질적 미에 불과했다. 물질적 판단에 빠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미로, 본래의 일본적인 미와 가치를 잃은 것이었다. 절대미에서 상대적 미로 전락한 것이었다.

미시마에게 금각사의 진짜 미는 일본 역사와 정서로만 볼 수 있는 야마토(大和)정신을 가진 미였다. 그렇기에 물질적 미에서 정신적 미로 바꿔야 하는 사명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왜곡된 실체의 미를 걷어내고 영원한 허무의 미로 소생시켜 속웃음으로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랐다.

미는 마음으로 읽어내어 느끼는 일본 정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로지 사라지게 함으로써만 영원히 존재하는 미였다. 그러나 그런 미의식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파괴로 태어나는 허무의 미를 일본 정신으로 발현시켰기 때문이다.

미시마는 오로지 태워서 사라지게 해야 성립하는 허무의 미처럼, 희생을 통해서만이 일본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은것이었다. 지금의 일본 정신은 서구적 가치에 오염된 것으로 일본 정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미시마는 서구의 시선으로 의식하고 있는 금각사의 미가 진짜의 미가 아니듯이, 일본이 갖는 정신과 정체성은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했다. 그는 금각사의 미를 허무의 미로 재생하였듯이, 서구에 오염된 현재 일본 정신과 정체성을 재창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설 《금각사》에서 미조구치(溝口)가 금각사에 불을 질러 사라지게 했듯이 미시마는 자신을 소각하여 서구적인 일본의 재창조를 바랐다. 금각사의 미에 홀렸기에 불을 질러 소각하여 영원한 미를 추구했던 미조구치(溝口)는 일본에 홀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일본 정신과 정체성을 재생시키려 했던 자신의 분신이었다.

금각사의 소각으로 허무의 미를 완성하였듯이, 결국 자신의 소각으로 일본 정신과 정체성을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가 추구한 사의 미와 생의 미는 미의 완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생과 사가 일치하는 시점에서 자신을 소각한 미시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 마음속에 생명이 있는 채로 박제된 미시마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시마는 금각사의 미를 게걸스럽게 독식한 탐미주의자였고, 자신의 생명을 죽여 일본 정신으로 승화시킨 탐미적 애국주의자였다. 일본을 위한 자신의 소각은 일본을 위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였다는 점에서 영혼의 탐미주의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위함이 누락된 순정과 짝사랑’은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각사와 죽음을 통해서 올곧고 순수한 미시마를 볼 수 있었다. 일본에 대한 충정으로 자신을 소각하여 산화해 간 것은 ‘자신을 위함’을 누락시킨 일본에 대한 순정이었고 짝사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시마가 구상하고 있던 일본 정신은 선과 악, 일부와 전체, 생과 사, 미와 추 등이 갈라져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로 존재하는 일본적인 화(和)였던 것이다. 그렇게 미시마는 일본 정신의 회생을 강하게 믿어 ‘그 완성을 위해 길목을 지나가는 나그네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미시마는 수없이 존재하는 ‘일본’ 가운데 자신이 구상한 ‘일본’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졌다. ‘자신이 구상한 일본’을 위해서 헌신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당시 일본과 시대정신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아니었다. 목숨을 바친 일본은 마음속에 깊이 있었다.

한때 조국이라는 이름에 현혹되어 일시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하였다고는 하나, 마음 깊이 존재하는 까닭에 일본을 위해 자신을 소각한 미시마의 신념과 행동을 보면서, “조국이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라는 위선적 질문에 대해서 답을 내지 못한 채 금각사를 노려봤다.


continued story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18화   세상은 눈 밖에 인연은 마음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