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우리’의 완벽한 하루

by 청사


세상은 아름답다. 내가 만들거나 독점적으로 소유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마음대로 볼 수 있는 해와 달이 있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는 공기와 바람이 있고, 즐겁거나 그리울 때 의지하거나 공명할 수 있는 것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로맨스(ロマンス) 열차에 몸을 맡긴 채 다시 달렸다. 목적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열차는 나의 분신이었다. 보일 듯 말 듯 앉아있는 산과 편하게 널브러져 있는 들판은 타인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었다. 셀 수 없이 다가오는 언덕에서 구릉지로 구릉지에서 정상으로 뻗은 길은 나의 길이었다. 그런 모습이 꿈이 아니길 바랐다.

도착해 보니, ‘신이 사는 산’이라는 하코네(箱根)를 설명하는 푯말이 맞이했다. 예로부터 활화산, 온천, 호수, 예술품, 계곡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신이 사는 곳이라면 인간계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 좋았다. 신이 사는 곳에서 혼탁함을 털어버리고 신성함을 채워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했다.

푯말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이는 허름한 철도역이 있었다. 신이 사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등산철도가 기다렸다. 근대화기에 스위스철도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었다. 미쓰미(三井) 물산을 지탱해 온 실업가 마스다 다카시(益田孝)와 정치가였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일본발전과 해외 관광객유치를 목적으로 건설했다고 전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활동한 이노우에 카오루가 건설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등산철도를 앞에 두고 구석구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애국적 정의라는 두 글자에 목메고 있었다. 누구에게 악은 누구에게는 선이 되고, 누구에게 선은 누구에게는 악이 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쓰임새는 애국적 정의를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역사적 감정을 모르는 채 기다리고 있는 등산철도는 강렬하면서도 촌스러운 빨간색을 입고 있었다. 붉은 사상에 빠졌을 때 저돌적으로 다가가 상처를 입었던 그 빨간색이 연상되었다. 마치 ‘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악마가 사는 곳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 지옥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큰 울음을 터뜨렸다. 전통적인 제복을 입은 여차장은 맑고 조용한 목소리로 안내를 했다. 웃는 하얀 얼굴, 빨간 모자, 남색의 제복은 매우 잘 어울렸다. 열차 안에는 뒷모습만을 보이는 기관사, 그리고 다리를 꼰 차장과 눈알을 돌리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어색함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누군가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어디에서 내릴지 모르지만 내리는 곳까지 동행인이 있어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의미 없는 것들을 의미 있는 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는 사이에 점차 몸이 기울어져 산으로 향했다.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힘이 한계에 도달할 때쯤 빨간 의자가 등을 열정적으로 떠밀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은 마치 나의 인생길과 같았다. 나의 인생을 그리며 가고 있는 듯한 이 길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인생은 한 번 가면 되돌아오는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길이 철로처럼 잘 놓이길 바라고 있었다.

잘 올라가고 잘 내려오는 기찻길과는 다르게, 인생길은 잘 올라가도 잘 내려오기 힘이 든다. 인생길은 지나가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이다. 거기에는 지난 길과 새로운 길의 긴 호흡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점과 끝점이 단절되지 않은 채 단절하며 가는 길이다.

길가에는 일생을 이곳에서 보내면서도 활짝 웃는 보랏빛 수국이 즐겁게 만남과 이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송이송이 가득 담아 터질 것 같이 부풀어진 수국의 함박웃음은 기쁨이었고 수줍음이었다. 이름 모르는 잡초와 들꽃은 각각의 사연을 가진 이곳에서 소박한 웃음과 조용한 외로움을 열차의 소음에 실려 보내고 있었다.

도쿄의 잡초와 하코네의 잡초는 그렇게 소통했다. 내 가슴에는 ‘도쿄에서 멀어지면 웃음꽃이 핀다.’라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논리가 생기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났다. 도쿄에서 칼날과 같은 스침으로 삶을 위해 투쟁을 하다 지치면 꽃들이 웃어대는 이곳으로 오면 된다는 감정이 생겼다.

인생에서 활짝 핀 꽃길을 갈 때는 오로지 세 번뿐이다. 한 번은 인생을 시작할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인생을 마감할 때이다. 세 번째는 남녀가 하나가 될 때이다. 그러나 잘 보면, 우리는 영원히 꽃길만을 걷을 수 있다. 항상 꽃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탄 열차는 어느새 산속 깊은 곳을 향해 달렸다. 이 여정은 볼 곳이나 머물 곳이나 쉴 곳을 정해놓지 않았다. 열차가 달려가는 곳이 목적지였고 머무는 곳이었고 쉼터였고, 거기에서 보이는 것이 볼거리였다. 올라가면 올라갔고 내려가면 내려갔고, 보이면 봤고 안 보이면 안 봤다. 눈과 마음이 가는 대로의 여정이지만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푯말이 고고한 자세로 서있는 곳에 내렸다. “아니 이 산속에 무슨 조각품!”이라는 의문이 들면서도 답을 찾지 않았다. 조각의 숲(彫刻の森)이라는 야외 조각 공원이었다. 의문이 있거나 없거나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었다. 눈앞에 넓게 펼쳐진 들판에 듬성듬성 고개를 들고 있거나 옹기종기 앉아있는 조각품들이 시선을 흡수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몸체 없이 누워있는 거대한 얼굴상이 들어왔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작가의 〈탄식의 천사〉(嘆きの天使:La Pleureuse)였다. 뜬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머리는 작은 식물들로 치장을 했다. 그 순간 ‘이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생각이 맞는 듯했다.

옆으로 누운 얼굴의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아 아주 작고 얕은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눈물로 만들어진 연못이었다. 탄식으로 만들어진 연못이었다. 그 눈물이 삶의 향연인지 삶의 절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의 사연을 따지지 않고 흘렸던 자신의 눈물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자신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눈물의 의미는 무어인지? 언제까지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등 갑자기 〈탄식의 천사〉가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낯선 이곳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뜨거움을 식혔다. 그러나 내 눈물을 담고 있는 산시로 연못이 클로즈업되면서 고인 눈물이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솔직한 것이었다. 눈물이 나는 것은 자신만이 아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눈물은 불덩이를 끄는 의식이었다. 눈물은 고였다가 흘러야 제맛이었다. 나의 눈물은 흘리고 있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흘리게 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눈물은 흘리게 하는 사람이 봐줘야만 낫기 때문이다.

<탄식의 천사>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급하게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보며 바람 불듯이 가벼운 웃음으로 눈물을 날리고 있었다. 당황한 마음에서 목례하고 발길을 옮기는 순간 말을 걸어왔다.


“한국사람...”

“... 예”

“웃어서 미안하지만 천사의 눈물과 닮은 것 같아서... 그만”

“그래요? 눈물로 채워진 연못이 생각나서요!”

“그런 연못이 있는가요?”

“예, 여기 탄식의 천사가 만든 연못을 닮았어요. 저만이 알고 있는...”

“그 연못의 물은 짜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그곳에 가면 상처가 쓰리면서 낫는 것 같아요.”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그 연못은 마르지 않았을까요?”

“또 흘리면 되지 않겠어요?”


신이 산다는 산에 와서 눈물을 멈추게 해 준 두 여인과 함께 이후 여정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고등학교 친구로 한 사람은 간호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의사였다. 이후 같은 병원에 근무하면서 혼자서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깍지를 끼고 걷는 모습은 어색해 보이지 않았고 매우 좋게 보였다.

그녀들과 동행하면서 내가 흘린 눈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내가 흘린 눈물은 탄식이었나 외로움이었나 아니면 그리움이었나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깊고 뼈아파 온몸으로 서러워하는 탄식도 아니었고, 혼자 있어 생기는 외로움도 아니었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어 생기는 그리움이었다. 눈물의 주인공이 보고 싶은 그리움이었다. 달궈진 그리움의 눈물이 그녀들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눈물로 보고 있는 깊은 산속에서 포효하고 있는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의미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이 연출한 조각의 세계보다는 조각품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 없이 영원히 한 곳에 서있는 정지된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내어 ‘움직이는 조각품’을 만들고 있던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역동성과 감성이 만들어가는 사람의 세계였다. 사람의 세계는 일시적으로 우연히 만들어져 사라지는 순간의 미(美)를 창출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이곳에서 발산하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미로 생겨났다. 거기에는 나와 다른 두 여인이 만드는 작은 세계도 있었다.

나와 두 연인이 만든 세계는 보고 지나가는 것이지 잡아두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지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느끼는 것이지 만져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원히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같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홀로 가는 외로움이 아니라 둘로 가야 하는 생기는 그리움을 위로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발길은 피카소의 컬렉션으로 향했다. 도시에서 화려하고 폼나게 살던 피카소가 이 깊은 숲에 들어와 안착한 듯하였다. 돈에 매수된 영혼이 산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방랑기를 쫙 짜버린 자연인으로서 피카소가 있는 듯했다.

피카소의 작품과 함께 어록이 눈에 들어왔다. 거장의 사고는 아주 작고 소소한 곳에서 생명을 살리고 있는 듯했다.


“사랑은 논의가 아니라 사실로서 시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생명이다. 나의 친구나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영감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나의 숙명은 일하는 것, 숨을 쉴틈도 없이 일하는 것이다. 나는 행동이고 창조이고 열광이다. 나의 발상은 현실 가운데서 구한다. 자연만이 나의 상상력을 움직이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는 순간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마음의 변동을 따른다. 그림은 작가의 욕구가 그곳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 작가는 종종 자신이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에 놀란다. 선이 대상을 탄생하게 하고, 색이 형태를 암시하고, 형태가 주제를 결정한다. 예술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예술작품은 현재 내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거장의 예술은 과거의 예술이 아니라 현재의 예술이다.”(彫刻の森. 피카소의 어록에서)


피카소의 예술세계는 수많은 불완전함이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불완전한 사고와 생각이 작품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이었다. 불완전한 상태를 나태하지 않게 질주하게 한 것은 피카소만이 갖고 있었던 처절한 투쟁의식이었다. 그것이 그만이 갖고 있는 예술혼이었다.

피카소의 작품은 현실과 마음의 변동에 의해서 구성된 우연이었고, 외로운 투쟁에서 오는 절규였고 환희였다. 계획된 선이 움직이는 가운데 예상치 않은 변동에 의해 하나의 완전한 작품이 탄생되는 것이었다. 그의 어록은 천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고뇌를 하다 보니 천재가 되어간 것이라는 속이 깊은 인생을 말하는 듯했다.

범민으로 사는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걷을 수 있을까? 계획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동에 의해 바뀌게 될 수 있을까? 정해진 길에 서게 되어도 애당초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일까? 홀로 가는 여행에서 두 여인과의 만남은 눈물이 만들어낸 변동의 서막일까?

세 사람으로 구성된 ‘우리’라는 임시 울타리는 그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변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피카소의 경험이 우리 상황에 맞아떨어지고 있는 듯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도 하지 않은 상황이 계획한 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변동하고 있는 상황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동행했다.

우리는 두려운 곳으로 알려진 오와쿠타니(大涌谷) 계곡으로 향했다. 군데군데 옹기종기 앉아있는 웅덩이가 뿜어내는 수증기는 마치 음모를 꾸미다 들켜버린 형상이었고, 수증기가 품어내는 한숨 소리는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비밀도 없다고, 아무 죄가 없다고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오와쿠타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조각의 숲에서 생긴 변동의 실체인 ‘우리’와 매우 닮아있는 듯했다. 비밀스러우면서도 숨긴 것이 없었고, 위험하면서도 편안했고, 이해하면서도 두려웠고,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이었고,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나를 보면서 누군가의 눈길이 필요했다. 동행하고 있던 여의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기 사이로 피어나는 여의사의 눈은 맑았지만 눈빛에는 흔들림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리움과는 닮지 않은 자신감이 있었고 희망적인 흔들림이었다.

나는 갑자기 여의사가 표출하고 있는 희망적인 흔들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채 강한 냄새로 빨아들이는 산을 내려와 아시노호수(芦ノ湖)로 향했다. 혼탁해진 마음을 털기 위한 의도적인 움직임이었다. 아시노호수는 모든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이 살갑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파란 하늘이 수놓은 호수에는 지독한 그리움으로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곁눈으로 보니 물속에는 이미 나만이 알 수 있는 그리움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의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외면이라는 수단에 의지하고 허공을 봤다. 그러나 물속에서 앓고 있는 지독한 그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호수 위로 거대한 유람선이 달리면서 울퉁불퉁한 사연과 고뇌를,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하는 그리움을 파도로 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잔잔하게 노출된 사연과 고뇌의 소리는 작은 물보라 소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가끔 울어대는 고동 소리는 괴롭다는 소리였고 아름답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시노호수 건너편의 설산은 아시노호수를 빙자해서 입맞춤을 했다. 나는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을 떠나보내고 동행인과 함께 온천호텔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온화한 물빛, 부드러운 물살, 청량한 물소리가 기다렸다. 아마도 괴로움이나 슬픔을 치유하기에, 그리고 기분을 전환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마치 신선만이 있어야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에도시대의 도쿠카와 쇼군, 대문호인 파초(松尾芭蕉),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등이 쉬던 휴양지이며 경륜을 논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시대의 영혼들이 어떻게 쉬었다 갔는지에 대해서 개의치 않고 온천수가 내는 진한 향을 만끽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의사와 간호사는 비키니를 입고 나타났다. 산속 온천수에서 입은 비키니는 의뢰로 잘 어울렸다. ‘여행은 가득한 삶을 내려놓는 여정이다. 여행지는 편하게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다. 여행자는 말없이 통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우리는 온천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온천수는 그리움의 강도를 완화하려는 듯이 따듯하게 흘러갔다. 속마음이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의 무게로, 그리움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던 그리움이 작은 폭포 속으로 사라졌고, 그리움의 무게는 물살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리움의 고백을 해도 폭로되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으며, 답을 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이곳저곳 사진을 찍었다.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온천을 앵글 속에 담는 사이에 갑자기 빛나는 금색의 비키니가 들어왔다. 금색의 비키니를 입은 젊은 여성은 중년인 듯한 남자의 품으로 가끔 넘어지면서 밀애를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과 중년이라는 조합은 아름다운 한 쌍이라기보다는 다시 보게 하는 남녀로 보였다.

이번에는 술 냄새가 가득 풍기는 탕으로 향했다. 술기운에 몸을 맡기듯 흐느적흐느적 술꾼처럼 움직였다. 그 순간 금색 비키니를 착용한 앵글 속에 본 그 여성이 우리를 향해왔다. 카메라를 가리키며 “무엇이 찍혀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문신이 있는 중년 남성이 나타나 거칠게 항의했다.

그들은 필름을 확인한 후 무지개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문신남과 금색 비키니는 카메라 속이 아니라 내 눈에 깊이 남았다. 동시에 불륜 관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확인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설정한 불륜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불륜은 배우자가 알지 못하게 바람을 피워야 하고,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야 하고, 된서리를 맞아 깨져야 성립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의 유발인자는 욕망이나 쾌락이어야 하고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불륜이라는 단어와 상황에 접하면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 그리움이 어떻게 표출될지 두려워졌다. 자유로워진 이곳에서 그녀들과의 의미 없는 접촉들이 그리움을 달래는 약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온천수에 몸과 마음을 담그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즐거운 소동은 그리움을 잊으려는 표현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잊고 싶다는 신호였다.

그녀들과 부딪치는 순간을 억지로라도 외면하기 위해 먼 산을 봤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눈앞에 있는 것은 만개한 꽃과 같은 그녀들의 웃음이었고, 봉우리와 같은 그녀들의 가슴이었고, 계곡과 같은 그녀들의 사타구니였다. 그 느낌에 대해서 단호하게 사랑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나는 마음속에 빳빳하게 서있는 강직한 그리움이 물에 빠져 형체를 잃은 솜사탕이 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기묘한 허물어짐에 대해서 동정에 빠진 것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피어나는 욕망이라고 해야 할지, 일순간 생긴 풋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 구석에 숨어있던 돌발적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움이었다. 더욱이 그리움으로 생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온천수에서 나오는 따듯한 기운이 서로의 끈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했던 외면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외면이 세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내면의 고동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사라졌다. 오히려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의도된 외면’에서 비롯된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잘 정리되지 않는 외면이 만들어낸 파고를 갖고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외면은 쉽게 정리가 됐다.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느끼는 외면이 만들어낸 이 상황이 놀라울 정도로 정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면하며 보고 있는 서로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예상치 않은 변동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라는 묶음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감정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공간에서 두 여인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위로하듯이 안아줬다. 그것은 분명 그녀들 사이에 자리 잡은 질서였고 감정이었다. 여의사의 한 손은 안고 있는 간호사를 쓰다듬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나를 불렀다. 한 눈은 간호사를 향해 있었고, 다른 한 눈은 나를 향했다. 몸의 한쪽은 간호사에게 밀착되어 있었지만 남은 반쪽은 나에게 내줬다.

그 순간 그녀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은 이미 가치를 잃었다. 서로를 안고 있었고, 앞에서 진동하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세 사람이라는 홀수에서 시작된 불균형에서 여섯이라는 짝수로 된 균형이 만들어졌다. 세 사람의 몸체에서 흐르는 육감이 부딪치면서 언제가 가본 듯한 길을 찾아갔다.

거칠게 교차하는 호흡은 손길이 이끄는 대로 맡기면 되었다. 혼란스럽게 여겼던 부딪침은 감정과 몸이 익혀낸 질서에 의해 잘 진행되었다. 서로가 시도하는 몸과 마음의 엉킴은 사랑하는 듯 서로를 원하게 하였고, 거기에는 가식과 부끄러움이 없었다. 두 여인과 한 남자가 만들어낸 감정은 정교한 언어보다도 더 잘 표현되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주도한 비상상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기에는 반성이나 죄의식보다는 위로해야 한다는 가장 단순함이 작용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엉켜야 한다는 속세의 기준은 사라졌고, 두 여성과 손을 잡는 것이나 셋이면 안된다는 도덕적 판단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거기에는 너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우리’가 있었다.

조용한 틈새가 ‘우리’ 속에 생기면서 ‘우리를 묶어놓은 상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여의사는 “부끄러움이 없었고, 마음을 기댈 수 있었으며, 인생의 부분이었기에 하나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간호사는 “낯설었으나 새로움이 있었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위해주었기에 힐링”이라고 했다.

그녀들이 말하는 삶과 힐링에 귀를 기울였고 또한 크게 동조했다. 그러나 나는 강하게 ‘누군가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외면을 외면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삶과 힐링’이라는 상황은 나에게 그리움이었다. 힐링과 삶은 그리움과 결을 달리하고 있었으나 같은 곳을 향하게 하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했다.

불완전한 자신의 실수이거나 충동적 일탈이었거나, 알 수 없는 마법이 작동했다거나, 무분별한 애정행각을 벌인 욕망이었다고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사무치게 뼈아픈 그리움을 꺼낼 수 있는 기회였고, 내가 앓고 있는 질병이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타인과 바람을 피우면서 사랑이라고 해명하기도 한다. 추잡하게 보이는 야동을 보면서 예술이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폭리를 취하면서 평등한 거래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일탈이었으나 실수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싸우면서도 평화를 찾는 노력이라는 논리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삼인 간의 만남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애당초 등산철도를 타면서 얻으려 했던 것은 신선이 산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목도하여 고뇌를 털어버리는 것이었고, 방목되어 있는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었으며, 빈 가슴을 아리지 않도록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마음을 비울 때, 방황에 빠져들 때, 목표를 잃어갈 때,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순식간에 다가온 그리움’이었다.

내 마음을 조종하는 사람이 누구 인지?, 내 안에는 들어있는 사람이 누구 인지?’ 분명하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면서도 여전히 내 안에 숨기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완전체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체된 허상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인생은 위선으로 숨긴 그리운 사람을 꺼내 아파하면서 그를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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