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을 찾고 있는 하이에나의 눈처럼 태양은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물기를 찾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와 그늘에 숨고 싶은 마음은 간절함으로 남을 뿐이었다. 막 가동하고 있는 에어컨이 뿜어내는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한낮의 뜨거움을 식히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기다리듯 반가운 손님을 기다렸다.
시민대학에서 활동하면서 인연이 된 4인으로 구성된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대학에서 각자가 경험하거나 연구한 내용을 기부하는 차원에서 강의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나이와 신분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되면 여러 주제로 담소를 나누는 사적인 모임을 주기적으로 해왔다.
도쿄 출신의 관료로서 많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동시에 반듯한 이목구비에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이치조 타로(一條太郎)는 맏형 노릇을 했다. 연세에 걸맞게 일본과 한국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가졌다. 그리고 성격적으로는 매우 관대했고, 한일 관련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계절마다 특산물을 나에게 보내줬다. 처음에는 그런 선물에 어리둥절해 거절했으나 유학생이라는 특수한 신분, 그리고 해주고 싶다는 말에 설득당해 그의 뜻을 존중했다. 이번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코시 히카리(こしひかり)라는 쌀을 가지고 왔다. 종종 나는 쌀을 받을 때마다 쌀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다.
가교역할을 하는 타카다 다카요시(高田孝義)는 시마네현(島根県) 어부 집안에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고교 시절까지 보냈다. 고교졸업 후 교토대(京都大)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한 후 거대 제철 회사의 법무팀에서 현장경험을 한 후 관서 지역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 정년을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매우 냉소적이면서도 관심을 끊임없이 가졌다. 더욱이 매년 한국을 방문해서 변화해 가는 모습을 깊이 있게 관찰하는 취미와 한국 음식, 그리고 한글에도 큰 관심을 가진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통으로 자부하였다. 그는 애주가답게 일본 술과 한국 소주를 들고 방문을 했다.
누님으로 통하는 도코이 아미(床井阿見)는 후쿠시마현(福島県) 출신으로 도다이(東大) 법학부를 나와 법조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맹렬 여성이었다. 여성 변호사로 화려하게 살면서도 지역에서 활동을 하여 인지도가 높은 사회활동가였다. 그녀는 달변가로 한일 간에 발생한 여성 문제, 인권문제, 재일 한국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법률적 지원과 활동을 해왔다. 그녀는 초밥(寿司)을 가지고 왔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의 공통점은 ‘친한파’라는 사실이었다. 오늘은 여름방학을 하였기에 초대하는 날이었다. 집을 방문하게 되면, 나는 관례대로 한국 음식을 준비했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자취하면서 기억해 낸 어머니의 레시피가 있어 제법 맛을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준비한 음식은 하얀 쌀밥, 고추장과 양파를 넣은 돼지 볶음, 김치부침개였다. 한국 음식의 맛을 보고, 한국 소수를 즐기며, 한국 사람과 한국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한일 현안이 화두로 올라왔다. 나는 가끔 한일 관계에는 김치와 같은 매콤함이 있다는 것을 느껴 회피하곤 했었다.
식견이나 통찰로 끌어가는 현안논쟁이 깊어지고 주고받는 잔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취기가 발동하였다. 각자 가슴에 담아두었던 속내를 말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게 냉철했던 이치조 타로가 취기가 오르면서 그동안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말을 걸지 못했던 한국 경험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에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줄 것을 청했다.
나는 우선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대학에서 만났던 산시로 연못의 여인 ‘이치조 마리’에 대해서 물었다. “혹시 도다이에 다니던 이치조 마리를 알아요? 동일성씨라...”라고 묻자 이치조 타로는 약간 뜸을 들이며 답을 물고 있었다. 재차 물었다. “혹시 이치조 마리와는 어떤...?”. 이치조 타로는 “압니다. 잘 압니다. 조카딸입니다.”라고 했다.
이치조 타로가 마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리로부터 도다이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연구과에 있는 한국 유학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치조 타로는 시민대학에서 만난 이후부터 줄곧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던 것이다. 갑자기 이치조 타로에 대한 감정이나 입장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당황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말 문이 막혀버렸다. 머릿속에는 온통 회오리 사고가 돌고 있었고,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가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일, 그리고 각종 계절 선물을 보냈던 일, 쌀을 보낸 준 것 등에 대한 의문이 비로소 해소되는 듯했다.
나는 얼른 화두를 돌렸다. ‘왜 한국에 대한 지식이 많은지, 한국과 한국인, 재일동포를 지원하고 옹호하는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국에서 지은 죄가 많아서, 진 빚 너무 많아서, 미안함 때문에, 한국인이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에”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가 던진 엄청난 단어들이 담고 있는 의미가 귓가를 맴돌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긴장된 모습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면서 여름날의 열기는 싸늘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떨떨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할 틈도 없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당시 ‘조선’에서 경험한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도다이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내무성 관료로 근무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으로 벌어진 참혹함 때문에 전쟁 트라우마에 걸렸다. 특히 그런 간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 전쟁으로 물들어 ‘제국의 땅’으로 변하는 상황에 대해서 깊은 고민과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 언젠가 전장에 나가 살생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결국 전쟁이라는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국이 제국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치조 타로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의 파견을 자원했다.
그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는 조선을 전쟁으로부터의 피난처이며 전쟁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있는 안식처로 인식했던 것이다. 조선은 적어도 제국의 땅의 최전선이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에게 조선은 낯선 구제의 땅이요, 전쟁이라는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평화의 땅이었던 것이다.
조선으로 건너와 관료로 부임한 이치조 타로는 처음에 생각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아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고차원적인 제국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부존에서 오는 각종 위기로부터 자신의 삶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처참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제국과 제국인이 되어 있었다. 빳빳한 제복을 입었고, 위협적인 모자와 완장을 찼으며, 허리에는 세상을 좀먹고 있는 부정을 퇴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칼이 붙어있었다. 지배자로서 그가 가는 길은 여전히 제국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전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치조 타로의 명령은 칼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였고, 움직임은 법 집행이 되었다. 제국인 고급관료 이치조 타로는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을 선택하였지만 제국 일본이 당면한 상황은 그가 그렇게 살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그는 조선에서 의도하지 않은 제국의 후원자로 그리고 식민지 지배자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조 타로의 마음속에는 ‘조국에 대한 진정한 충정은 제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게 인지했다. 전쟁은 국가와 모두에게 오로지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이 조선을 지배하고, 제국인이 조선인을 지배하고, 조선총독부가 조선 전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광대놀음을 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졌다.
제국과 자신은 그렇게 정반대 편에 서서 경원하는 애증 관계에 있었다. 이치조 타로는 제국과 자신이 전쟁을 둘러싸고 충정과 반역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경계선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노골적으로 반역행위를 하지 못했다. 정면으로 제국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제국 일본’이 아니라 ‘조국 일본’이 뿌리 깊게 내재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이 제공한 공권력을 ‘제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다지기 위해서, 제국 일본이라는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 그리고 전쟁의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용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입혀진 제국의 색깔과 냄새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욱이 가치혼란에 빠진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마음 깊숙이 있는 반전신념을 감추기 위해서, 타락한 관료로 위장하기 위해서, 제국을 거부함으로써 오는 공허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조선인에 대한 동정을 감추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광기 있는 대변자로 언행을 하는 모습을 각인시켰다.
따라서 조선인에게 그는 제국을 위한 집행자였고, 제국 일본인에게는 제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애국적 광기를 부리는 열성분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력과 자신이 권력에 기초해서 부리는 지배적 광기가 현실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딜레마에 빠진 이치조 타로는 제국이 추진하는 전쟁행위와 자신의 신념으로 표출되는 반전행위를 교묘하게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광기가 있는 지배자로서 그리고 암흑가의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전쟁을 하거나 살생을 하지 않는다를 결의만은 잘 지키려고 했다.
‘제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생기는 극도의 두려움과 홀로 가는 외로움은 항상 그를 괴롭혔다. 일본이 제국이었고 제국이 일본이었고, 반전주의자 이치조 다로는 제국 관료 이치조 타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되고 광기를 가진 행세를 위해 황금정(黃金亭)에 자두 드나들면서 주인이자 마담인 김은홍(金銀紅)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치조 타로가 황금정에 갈 때면 왕의 행차처럼 당당하고 화려했다. 주인이자 마담으로서 무지개 색깔을 가진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의 팔짱을 끼고 교태를 부리며 반갑게 맞았다. 그들 사이에 쌓인 친근하고 애틋한 마음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그 배경에는 김은홍이 조선총독부에 부임한 이후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치조 타로에게 들인 정성과 전략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은홍은 다른 일본인을 제치고 특별하게 대우를 했다. 이치조 타로는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식견, 그리고 비단결 같은 마음결을 가진 김은홍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녀로 인하여 전쟁의 병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으로 김은홍이 삶의 동반자이자 자신의 일부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이에는 여전히 똑바로 내보일 수 있는 정과 숨기고 있는 전략이 동시에 작동하였다.
김은홍은 어린 시절 조선 갑부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나 유학하는 도중에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조력하던 부모가 일본의 감시가 심해져 급히 만주로 이주했다. 이후 김은홍은 학업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여 가업 중의 하나였던 황금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황금정을 운영하는 김은홍은 정계뿐 아니라 권력자와의 관계를 이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특히 절세의 미모와 화려한 말솜씨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명성이 나있었다. 꾸미지 않는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짧고 강한 시선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력의 힘을 가진 여인이었다.
김은홍은 기생조직인 ‘권번’(券番)에 적을 뒀다. 나비 같은 가냘프고 매혹적인 자태는 경성의 뭇 남성에게 인정을 받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방에 출현하자마자 소리 잘하고, 춤 잘 추고, 거문고 잘 타는 경성 명기라는 칭송을 얻었다. 그녀가 가진 다재다능한 매력은 그녀가 많은 것을 하는데 필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김은홍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던 이치조 타로는 타인의 품에 안기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녀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황금정과 김은홍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했다. 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가 갖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안정적으로 황금정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사업을 확장했다.
많은 것을 갖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김은홍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그녀의 속마음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밀서와 같았고, 그녀의 행동은 냉가슴을 앓고 있는 뜨거운 밀사와도 같았다. 단순하게 왕금정을 운영하는 평범한 기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지원해 온 독립운동단체에 비밀리에 운동자금을 조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황금정은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며 임무를 수행하는 기생독립투사가 활동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조국 조선을 위해서 한 몸을 던질 수 있는 여성독립특공대였다. 그녀들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스스로 자진하여 이슬로 사라지는 애국심을 가졌다. 그런 기생 가운데는 임신하여 가족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 생식기를 적출하는 열혈여성도 있었다.
이 모든 비밀의 중심에 있는 김은홍은 제국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치조 타로에게 많이 의지했다. 이치조 타로는 김은흥이 전쟁으로부터의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있는 김은홍에게 많이 의지했다. 김은홍과 이치조 타로는 비밀을 간직한 채 그렇게 제국의 남과 여로 서로 의지했다.
그러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비밀스러운 평화 관계가 깨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치조 타로의 직속상관인 마쓰무라 유지(松村裕次)는 김은홍을 손에 넣기 위해 권력을 이용한 황금정의 존폐를 논하면서 “자기의 첩이 되어 달라”라고 최후통첩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김은홍은 마쓰무라 유지의 엉뚱한 협박을 뿌리치기 위해 당당하게 대응했다. “세상 사람들은 마쓰무라 유지를 침략자라고 합니다. 품위가 없는 기생일지라도 침략자의 첩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쓰무라 유지의 얼굴에는 황금정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한 어두운 암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예상치 않은 위기에 직면한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를 이용하기 위한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치조 타로에게 “마쓰무라 유지가 첩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라고 고백을 했다. 그것은 황금정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술책이었고, 마쓰무라 유지의 존재를 흔들기 위한 절체절명의 전략이었다.
이치조 타로는 공적 관계에서도 마쓰무라 유지의 전쟁정책을 둘러싸고 심하게 갈등을 빚어왔다. 조국 일본과 제국 일본을 두고 심한 견해 차이를 보여 앙숙이 된 상황이었다. 더욱이 사적으로는 김은홍을 둘러싼 갈등이 한계점에 도달해 있어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은홍은 머뭇거리고 있는 이치조 타로에게 노골적이고 당차게 몰아쳤다.
“마쓰무라의 첩으로 가도 괜찮아요?”
“그것은 있을 수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당신의 상관인데...”
“네게 맡겨요.”
이치조 타로의 마지막 말에는 떨림이 있었고, 무엇인가의 결심이 녹아있었으며, 얼굴에는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이치조 타로는 처음에 마쓰무라 유지가 자행한 불법적이며 사적인 비리를 이용하여 조치를 취하려고 했다. 그것을 이용해서 마쓰무라 유지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하는 조선인을 동원해서 조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맡길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치조 타로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상황에 대해서 균형을 잃은 자구적인 저울질을 했다. 이전부터 전쟁광 마쓰무라 유지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조국과 자신도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지했다. 언젠가는 목숨을 건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치조 타로는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와 더불어 ‘김은홍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물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속마음과 속살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것, 눈이 마주치면 서로 바라는 것을 알아채는 공감 동지라는 사실, 이성과 사랑이 엇갈리게 교차되면서도 행복한 관계라는 것,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사실 등과 같은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동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위기, 서로 신뢰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막연한 불신이 있다는 사실,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조국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사실, 식민지 조선과 지배국 일본이 만드는 선명한 틈을 메우기 어렵다는 사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가 작동했다.
이치조 타로는 김은홍과 자신의 목숨, 김은홍의 목숨과 마쓰무라의 목숨, 자신과 마쓰무라의 목숨 등의 교환이 가능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런 계산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은홍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라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치조 타로는 조선인 여성으로서 김은홍, 피식민지민으로서 김은홍, 황금정의 마담으로 김은홍, 조선에서의 안식처로서 김은홍 등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김은홍,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김은홍을 믿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치조 타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결심을 통해서 흔들리고 있는 김은홍을 안심시키려 했다. 자신과 동행해 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게 하려고 했다. 이치조 타로는 결단을 했다는 듯이 많은 암시를 했지만, 언제 어떻게 무엇을 결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입도 빵긋하지 않았다.
동시에 김은홍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아는 듯 이치조 타로의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그 순간마다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와 마쓰무라 유지가 동시에 사라지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쓰무라 유지는 이치조 타로의 마음속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은 김은홍의 마음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후 이치조 타로를 만날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다. 이치조 타로와 마쓰무라 유지의 행방이 묘연한 채 궁금증과 시간만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매우 지친 모습으로 이치조 타로가 황금정에 나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치조 타로는 눈앞에 있었고, 마쓰무라 유지는 눈앞에 없었다. 그를 본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의 마음에 안도감보다는 깊은 떨림이 자리하고 있었고, 후회와 공포가 깊게 내려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치조 타로는 김은홍의 눈을 보면서도 눈 마주침을 길게 끌어가지 못했다. 몰골도 초췌했고, 말소리도 흐렸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의 모습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말로 표현되지 않고 형용할 수 없는 정막함이 이 순간을 이어갔다. 허공을 떠돌고 있는 침묵만이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은홍은 조용히 이치조 타로의 얼굴을 끌어당겨 가슴에 묻었다. 움푹하고 포근했던 가슴은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녹여온 그것이 아니었다. 깊은 떨림과 흔들림의 파고가 가슴팍에 파고들면서 뭉클한 전율이 흘렀다. 김은홍은 가슴을 채우고 있는 아픔이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고, 끄집어내어 치유해야 할 불덩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치조 타로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듯이 때가 되면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새겼다.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의 신체가 아니라 그의 생명과 인생을 강하고 힘차게 감쌌다. 그녀의 가슴에 기대고 있는 사람은 제국인이 아니라, 조선을 침략한 제국 놈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칼잡이가 아니었다. 김은홍에게 이치조 타로는 반전주의자이기 전에 제국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세상이 규정한 선과 악을 구분하여 퇴치하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규정한 선과 악은 그들만의 리그이고 거기에는 상처로 생기는 승패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규정한 선과 악처럼 세상이 규정한 조선인과 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김은홍과 이치조 타로는 자신들이 규정한 조국과 삶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다.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를 안고 인간사의 이치에 대해서 속삭였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어! 사랑에는 공짜가 없어! 그렇게 당신과 나 사이에 많은 의미가 있는 세상과 공짜가 있을 뿐이야!” 김은홍은 이치조 타로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 그리고 이후 살아가는 꿈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continued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