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늙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역사를 가진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행사가 있어 서둘러 왔지만 이미 익숙한 제창 소리가 벽과 창문을 뚫고 새어 나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힘차게 삐져나오는 색다른 소리는 어둠 속으로 아름답게 사라지기보다는 긴장감으로 뭉쳐진 여운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대학 시절 눈물을 흘리며 핏대를 올려 간절하게 불러댔던 리듬과 가사가 옛 상처를 후볐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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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 행사를 하면서 제창하는 애국가였다. 일본 한복판에서 애국가를 부를 자유는 있었음에도 스스로 통제해 왔던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빠짐없이 흥얼거리면서도 눈치를 보는 심정적 부담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기는 대한민국거류민단 지부였다. 행사장 안에 들어서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잡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일본풍의 중년과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서서 애국가를 부르는 애절한 모습은 많은 사연이 있는 행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했다.
애국가의 가사도 듬성듬성 뛰어넘고 발음도 맑았다 흐렸다 하여 가끔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 가사와 노랫소리에 의지하여 제창하는 목소리는 몹시 흔들렸고 나약하게 들렸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에는 민족이 있었고, 개인의 절절한 삶이 있었고, 한이 서려 있었다.
지부 부단장을 맡은 구로다 데츠로(黒田鉄郎)가 사회를 봤다. 그는 재일동포 3세로 서투른 한국어로 순서에 따라 행사를 진행했다.
“관동대지진 희생동포위령제 70주년을 맞이하여 이 땅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신 동포 여러분의 영령을 위로하는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일동 묵념”
반주도 없었고 화려함도 없었다. 모두가 염원하는 소리 없는 묵념은 이슬로 사라진 영령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할 만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짧았으나 멀리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고, 무거웠지만 전달하기에 몹시 가벼웠다. 경직되었으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추스르기에 애절하고 엄숙했다.
역사책에서나 듣던 관동대지진이 지금 소환된 사실을 보면서, 그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가슴에 깊이 새겨진 아픔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누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어떻게 치유되고 있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뼛속에서 뱉어내는 한숨, 살 떨림으로 돋아나는 전율, 전신으로 몸부림치는 애처로움과 비통함은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목숨이 살아있는 한 숙명적으로 동행하는 가슴앓이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세대와 관계없이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묵념이 있은 후 헌화와 분향이 있었다. 한 송이 꽃으로 소환된 인생은 매우 단조로웠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한 줄기 향으로 피어나는 영혼은 매우 가냘펐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시대를 살아간 하나의 삶은 상처로 얼룩졌지만 헛된 것이 아니었다. 한 송이 꽃, 한 줄기 향기, 하나의 삶은 함께 할 것이라도 암시하듯 진하게 남았다.
이어서 연력을 소개한 후 초청받은 일본인 역사가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정리를 해주었다. 일본인이 보는 관동대지진은 어떤 것이었을까가 궁금했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지진대의 충돌로 관동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전화가 아물지 않아 인심이 흉흉한 상황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여파로 일본인들의 원성은 위정자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위정자들은 지진피해에 대한 증오와 불만이 자신들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나 소수 이민족을 등장시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회를 진정시키는 가운데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공모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무근언사(無根言辞)를 방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약 6,000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특히 치바현(千葉県)의 후나바시시(船橋市), 나라시노시(習志野市), 이치카와시(市川市) 등에서는 약 300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코 당시 발생한 비인간적인 역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역사는 지나가도 아픔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역사는 지나가도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부당하게 당한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제는 차별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속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는 세대에게 그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70년 전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일본의 젊은이들도 알도록 해야 합니다. 부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부에 대한 책임을 강도 높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있었는지를 후세에게 전해 다시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증언을 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연세가 있는 한 분은 당시 “아버지가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살해됐고, 어머니는 겨우 이웃 일본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당시에 있었던 진실을 전해 주었다.”며 당시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어머니의 증언을 전했다.
“당시 관동지방에서 자경단은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농아자 등도 폭행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일본국가를 부르게 하거나, 조선어 어두에 촉음이 없는 것을 알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십오 엔 오십 전(十五円五十銭) 또는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을 말하게 하고, 이상하면 조선인으로 인식하여 폭행을 하거나 그 이상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살던 마을에서는 조선인인듯한 사람이 오면 모두 경계를 하여 졸지에 조선인은 폭동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제의 일본인 지인이 오늘 적으로 바뀌었고 이웃들이 적으로 둔갑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무서워해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웃의 조선인이 ‘알잖아요.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라고 울부짖어도 경계했던 일본인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현재 어머니는 생전에 일본어를 말하는 것이 두려워 자식이 무사히 생을 이어가기를 바라면서 ‘일본국가, 십오 엔 오십 전(十五円五十銭), 가기구게고(ガギグゲゴ)’를 정확하게 배우라고 하셨고, 강도 높게 일본어 교육과 일본 교육을 시켰습니다. 언어는 소통 수단이 아니라 생사를 좌우하는 생명줄이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관동대지진이 남긴 유산은 많아 보였다.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으로 발생한 부의 결과를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앞으로 역사적 문제를 어떻게 정립하고 가르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당시의 차별적 인식이 삶 속의 관습으로 내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제국 시대의 조선인에 대해서 했던 차별의식이 평화 시대 한국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이어져 삶을 제대로 살 수 없게 하거나 인간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후 일본에서 한국의 해방과 일본의 패배라는 상황은 한국인을 편파적으로 그리고 차별적으로 몰고 가는 이유가 되기엔 충분했다. 관동대지진에서 한풀이를 하기 위해 조선인이 필요했듯이, 일본의 패배에서 한풀이를 하기 위해 한국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일선동화(日鮮同化)에서 일선분리(日鮮分離)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내재화된 습관적 차별은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생존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을 부각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 귀화해서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것, 일본을 버리고 귀국하는 것, 일본 사회에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것, 스스로 생명을 결정하는 것 등과 같은 생존전략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적인 선택보다는 생존을 위한 절체절명의 대응방식이었다. 만약, 일본이 어떻게든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나 희망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재일 한국인에게는 한국이라는 국적을 유지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찾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추모제가 끝나고 간단하게 담소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당당하게 재일 한국인으로 살면서 대한민국거류민단 지부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 사람이 화두에 올랐다. 추모제를 주관했던 민단 지부 3명의 임원은 어린 시절 도원결의를 한 사이였다.
그들은 파칭코(パチンコ) 사업으로 큰돈을 벌면서 지부 단장을 맡은 모리 히로시(森弘司), 고물상으로 시작하여 철강 사업을 하며 지부 부단장을 맡은 구로다 데츠로(黒田鉄郎), 그리고 한국음식점을 운영하며 지부 의장을 맡은 가네다 요시로(金田吉郎) 등 3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건장한 경호원을 대동하였고, 문신을 한 건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도카이’(東海)라는 간판을 당당하게 사용하였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요로시구네(よろしくね)’를 건넸던 그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부 의장으로 활동하는 가네다 요시로(金田吉郎)였다. 이제야 ‘도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칭 3인방은 제국 시대에 부모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새롭게 인생을 개척해서 성공한 입지적 인물이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신분과 일본인이라는 신분을 동시에 가졌다. 그들은 통칭으로 일본 이름과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필요하면 한국 이름과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조국 한국을 버리기보다는 현재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순하게 일본에서 태어났기에 일본에서 살아가는 운명에 있었다. 제국 시대 말기와 일본패배라는 공간에서 태어난 이른바 낀 세대였다. 선대가 받은 차별과 멸시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패전 후 작동했던 차별과 멸시를 몸으로 생생하게 부딪쳤다. 부모들의 절실한 요청과 강압으로 학교생활을 끌어가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옆자리의 친구가, 이웃에 살던 오랜 친구가 일본인으로 돌변하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뼈아픈 경험을 공유했다. 원래 3인이 아니라 4인으로 움직였다. 같은 동네 이웃으로 살았기에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을 해왔다. 어느 날 중학교 친구였던 아베 타카시(安部高司)가 학교 옥상에서 투신하는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을 두고 학교나 교육기관에서는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치부하여 급하게 사건을 마무리했다. 아베 타카시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골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민족차별에 의한 ‘집단 따돌림’(いじめ)라고 주장하였으나 무시되어 사건은 수면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3인은 도원결의를 하여 의형제를 맺고 살아남기 위해 삼강회(三强組)를 조직하여 대응했다. 그들은 오로지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 하나만을 생각했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저항했다.
그들은 하나로 뭉쳐 설득보다는 위협, 지식보다는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며 결과가 좋다는 것을 몸으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기득권을 갖기 위해 다양한 기싸움을 했다. 가장 힘세거나 영향력이 있는 일본인 학생을 골라 힘으로 제압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싸움은 인종에 기초한 민족전쟁과 차별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인식으로 인한 차별이 부모 시대에 작동했듯이 여전히 자신들의 삶과 인생을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인식적 편견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피의 순결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일본인과 결혼하여 신분을 세탁하여 한국인의 순결성을 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민족적 인식과 차별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일본인과 대등하게 살아가는 수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등하거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며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런 결심은 결코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거나 차별에 대해서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부모, 부모가 겪은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낭자하게 흘린 피비린내를 지우고, 자신들과 다음 세대가 그 피비린내를 맡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여 인간답고 평범하게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것이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흔적을 지울 수 없었고, 한국인이라는 자신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자신과 세대를 지키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고, 한국인으로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라고 인식했다. 그들은 한국인을 버리고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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