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획하는 단계에서 반은 지나고 출발하면서 반은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지에 도착해서는 계획한 내용을 일일이 탐방하여 맛을 만끽하는 것들이 추억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행은 공중에 부양하여 세상을 향해 크게 웃어대는 뭉게구름과도 같고, 정주하지 않는 나그네의 마음이어서 좋다.
우리를 집요하게 잡았던 일본정부의 지진주의보는 출발 하루 전 해제됐다. 동시에 ‘예의 주시하라’는 당부도 노란 무처럼 곁들였다. 일본식의 전달 방식에 익숙한 터라 전자의 전언만이 매우 정확한 과학적 진단이라고 굳게 믿으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추슬렀다.
새벽 3시 기상을 하고 집을 떠나기 전 공항터미널 주차 상황을 확인해 보니 제2여객터미널 주차장은 여유가 있어 안심했다. 슈트케이스가 트렁크로 들어가고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각자 잠을 청하는 가운데 어둠을 뚫고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8월 하순 여름 피서객은 이미 제철을 넘겨 한산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새벽 5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와 사람들이 분볐다.
오랜만에 손에 쥔 패스포트가 반짝반짝 아름다운 빛이 났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한결 들떠 여행지로 향하는 듯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서로의 눈을 보면서 여행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뇌했던 순간을 날리기 위해 파이팅을 외쳤다. “가보는 거야! 가보는 거야!” 그렇게 새벽공항의 공간은 우리가 품은 희망으로 채워졌다.
화물확인증을 받고 보딩체크를 하고 보안검사를 받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혁대를 풀고 조끼를 벗으라고 했다. 경고음이 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안 검색대를 들어서면서 숨어있던 긴장감이 살아났다. 보안요원이 지적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 안도의 인사를 건넸다.
약간 흥 위에 올라앉은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예약한 물품을 찾기 위해 면세점으로 향했다. 몇 년 전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S자가 들어가는 면세점만이 물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뿐 다른 면세점은 그야말로 텅텅 비었다. 언젠가 면세점을 차지하기 위해 대기업들이 벌인 치열한 경쟁무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보유하고 있는 면세점을 운영하는 기업의 주가가 떨어지는 이유를 이곳에서 확인하는 듯하여 손절타이밍을 생각해 봤다. on line이나 off line의 경쟁, 대형면세점과 지역상가 간의 경쟁, 가성비 좋은 일반상품과 브랜드 간의 경쟁 등이 치열해진 것이다.
더욱이 깃발여행에서 자유여행으로의 흐름, 유명관광지에서 지역관광지로의 발길돌림, 과시적 소비에서 실용적 소비로의 변화, 눈으로 보는 여행에서 체험 여행으로의 방향전환, 지역글로컬화라는 새로운 트렌드, 상품앱플렛홈 시대 등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라고도 여겼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상술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변화하는 지를 간파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한발 딛고 보면 이미 가버렸고, 한발 앞을 보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상품이 개인의 흥미를 유도하는 현상에서 개인의 호기심이 상품을 좌우하는 현상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면세품을 받고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는 데 30분이나 소요됐다. 문을 열고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서면서 마주치는 알지 못하는 눈들이 반가웠고, 서로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입맛을 부츠 겼다. 식사를 마치고 탑승게이트 의자에 앉아 지나치는 발길을 보는 사람멍에 빠졌다.
J자가 들어가는 비행기의 탐승이 시작되었다. 탐승의 꽃은 좌석을 찾아 앉는 것이 아니라 밝게 인사하는 승무원의 만남송을 듣는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내재화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바로 앞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인을 안내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탑승이 완료되고 하늘을 향해 진격하는 진동과 파열음이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저가 비행기를 탔기에 별도로 식사를 주문하지 않아 마땅히 거쳐야 할 의식, 기내식 맛의 과잉된 평가나 들뜬 정겨움이 사라져 약간의 후회와 아쉬움이 남았다.
눈을 감자 어느 순간 잃어버린 것들이 꿈속에서 파노라마로 소환되었다. 살아가는 삶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쨌든 여행은 지속되기를 바랐다. 신치토세공항(新千歳空港)에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에 잠이 깼다. 하차의 꽃으로 여긴 아쉬운 듯이 인사하는 승무원의 이별송을 기대하며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