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의 의례적인 이별송을 듣는 하차 의식은 만족스럽게 마무리됐다. 시원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홋카이도 날씨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후덥 찌근 했다. 일본에 살면서 몸에 배었던 습한 기온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듯했다. ‘아 역시 일본이구나!’라는 감탄사로 여정은 시작됐다.
하강하는 과정에서 비친 홋카이도의 풍부한 자연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이곳은 개발의 대상에서 보존과 보호의 대상이라는 오늘날의 시대 인식에 매우 잘 어울렸다. 아마도 여기에서 터를 잡았더라면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자연인으로 살고 사라지는 그런 삶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치토세공항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가는 도중 이곳저곳에서 두 손으로 간판을 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품 신고서 작성과 절차에 관한 안내였다. 그 모습에는 일본식의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와 절차를 밟으라는 엄격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시선이 한 중년여성의 간판으로 향했다. 한글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한글 간판을 거꾸로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음이 나오자 아내가 다가가 일본어로 “거꾸로입니다.”라고 속삭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간판을 보면서 고쳐 들고는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처음 유학을 하기 위해 나리타(成田) 출입국관리국의 입국심사를 받았을 때 제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선진국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입국하려는 한국인을 엄격하게 심사한다는 풍문이 자자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심사대 앞에만 서면, 돈을 벌기 위해 입국하려는 청년으로 오인되어 2시간가량 기다렸던 악몽이 가끔 되살아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유학을 한다거나 일본에 와야만 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당하게 출입국심사원에게 패스포트를 건넸다. 스모선수와 같은 건장한 청년이 시야에 들어와 약간 긴장을 했다. 입국하기 위해서 불합리한 규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야릇하게 웃는 전면 얼굴 사진을 박고, 양손의 검지 지문을 꽉 눌러서 찍었다.
‘왜 내가 상처를 받지’라는 반감인식과 저항의식이 동시에 살아났다. 약간 꺼림칙한 상황에 직면하는 순간 심사원은 “좋은 여행되세요.”라고 투박하지만 공손한 한글말로 인사를 했다. 심사대에서 발생한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대한 청년의 공손한 여운을 기억하며 빠져나왔다.
슈트케이스를 챙기고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삿포로시 오도리공원 5초메(大通公園5町目)까지 가기 위해 국제선 84번 승강장에서 리무진 버스를 기다렸다. 요금은 성인 1300엔이었고, 하차 시 현금으로 지불하면 됐다. 최근 일본이 화폐 인물을 바꿨지만 구 화폐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통할 수 있을 까라는 의문을 밟고 버스에 올랐다.
화폐의 인물은 그 시대가 추구하는 시대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선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만 원권 화폐에는 메이지시대 식민지민이 되지 않도록 개인과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고, 문명화 교육을 위해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学)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서구식의 근대화를 통해서 부국강병을 주창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만 원권 지폐에 등장한 인물은 메이지시대 정부관료를 지냈고, 다양한 사업개척과 산업을 부흥시켜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1840-1931)였다. 일본경제의 발전과 도약을 바라는 시대적 방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인물로 평가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겨운 일본경제가 크게 발돋움해야 한다는 국가와 국민의 절실함과 열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기다리던 리무진 버스가 도착했다. 탑승하니 안은 협소하고 낡아 보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선진국 일본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이 수준에 있단 말인가? 일본이 후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본식의 절약인지 하는 등 리무진 버스에 대한 이미지는 잘 나갔던 일본을 삐딱하게 보는 가늠자가 되고 말았다.
공항터미널을 지나자 시내버스처럼 곳곳의 정류장에 정차를 하는 것을 보고 공항과 시내겸용 버스라는 것을 알았다. 근무복을 입은 백발의 머리깔을 휘날리는 운전기사는 매뉴얼대로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리무진 버스는 고속도로 구간에 들어서도 이내 흥분하지 않는 속도로 달렸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기내에서 봤던 자연의 속살이 하나하나 벗겨지고 있었다. 눈에 익은 일본풍의 시가지에 들어서면서 목적지인 오도리공원에 도착했다. 도로 옆에는 공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드맨(guard man)도 공사 중이라는 푯말도 없었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박혔던 일본식의 정교함이 퇴색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만사형통하는 앱을 통해서 점심을 예약한 「우동 소우마야」(うどんのそうまや)로 향했다.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작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브라질 사람, 일본사람, 우리를 포함한 한국사람 등이 있었다. 독특한 간장맛의 일본향을 맡으며 30분가량 기다리니 능숙한 한국말로 점원이 안내했다.
우동집 안은 좁았기에 슈트케이스를 밖에 두려고 했지만 점원은 시야에 들어오는 입구에 쌓아놓으며 안심하라고 했다. 주문한 우동정식이 잽싸게 나왔다. 고명으로 얻은 튀김의 느끼함과 간장의 짭짤함이 매우 잘 어울렸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맛에 반한 닭튀김과 새우튀김을 별도로 더 주문했다.
일본맛에 취한 아내는 우동맛을 깊이 감상하면서 빠른 속도로 먹었다. 아내는 “그래 이것이 일본맛이야, 니시카사이(西葛西) 상점가에서 먹던 맛과 매우 닮아있어!”라고 속삭였다. 일본유치원을 다닐 때 우동을 좋아했던 큰 아이에게 “맛을 알겠니?”라고 묻자 고개를 흔들며 “모르지만 맛있어.”라고 답했다.
원칙과 기본을 잘 지키는 가운데 세워진 질서의 정연함, 더디지만 일탈하지 않고 정확하게 정도를 걷는 우직함, 타인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배려심, 꼼꼼하고 정교하게 수행하는 실천력 등 일본식의 자부심에 목숨을 걸어온 전통적 열기가 식어가는 듯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일본 위상과 심성에서 벗어난 현상으로 자신도 모르게 생긴 불신이, 우동집에서 느낀 일본적인 정서와 맛에 겨우 진정이 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나도는 일본의 위기라는 소문이 머릿속의 빈 공간을 점점 채워갔다.
혼란한 마음으로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각자 이것저것 기억에 있는 물건들을 챙겼다. 계산을 하면서 저렴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동남아 가격’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엔저효과라고 치부하며 애써 무마했지만 ‘일본의 조락’을 암시하는 듯 다시 착잡해졌다.
나의 조국도 아닌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작은 아이가 전통적인 여관을 가보고 싶다고 해서 예약한 쿠리야스이잔(厨翠山)으로 가기 위해 여관이 운영하는 셔틀버스 임시정류장으로 향했다. 일본식의 전통여관에 가서 우울해진 마음을 따끈한 온천수로 녹여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