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 동기 중 결혼 예정자가 있어 청첩장 모임을 했다. 청첩 모임이 대개 그러하듯 주선자가 모임 장소를 골랐고 단톡방에 뿌려진 주소는 청담동의 한 식당으로 우릴 안내했다. 클럽 입구를 연상시키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으리으리하게 넓은 공간에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왠지 친숙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놀란 것은 메뉴판을 열었을 때다. 떡볶이가 3만4천원, 찹스테이크가 4만9천원인 데 모자라 클라우드 한병에 1만4천원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결혼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 듀오 전용 만남 장소래.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둘러보니 평범한 소개팅보다도 더 엄숙한 분위기의 테이블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결혼정보회사 제휴(?) 업체라는 정보를 얻고 나니 어째 더더욱 심란해진다. 정녕 이런 터무니없는 밥값을 계산하는 것만으로 상대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특히나 요즘처럼 비싸고도 맛있는 음식이 온 천지에 넘쳐나는 세상에.
가격은 대략 8배에 육박하지만 맛은 대학 시절 학식의 그것과 유사한 오븐스파게티를 먹고 일어나는 길에, 애인에게 연락해 이 독특한 체험을 공유했다. 설명을 듣던 애인이 예전에 그 식당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며 반색했다. 청담동 카페 거리의 터줏대감이자 90년대 강남 오렌지족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거다. 서둘러 검색해보니 <밥블레스유>에서도 90년대 복장을 한 출연자들이 추억을 회상하며 시그니처 메뉴인 떡볶이와 인절미마운틴 등을 먹는 분량을 방송했다. (심지어 이영자에 따르면 그 시절 이 곳에서는 시켜놓고 안 먹는 게 ‘간지’였다고 한다!) 90년대 청담동 압구정 일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곳이지만 지방 출신인 나와 애인이 가봤을 리는 만무했다. 청첩 모임에서 함께 문화 충격을 받은 친구들 역시 각각 대구와 안동에서 초중고를 나온 이들이다.
그러고 보면 08학번인 나는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00~05학번 서울 출신 선배들을 통해 IMF 전후 태동한 이른바 90년대 ‘강남 문화’를 구전 동화처럼 접해왔다. 압구정 무슨 무슨 편집샵에서 병행수입 나이키나 폴로 비싼 거 하나 사고 지금은 자취를 감춘 프렌차이즈인 뱃고동에 가서 밥 먹은 다음 노래방 가서 놀면 잘 보낸 하루였더라, 도산공원 근처에 파인 다이닝이며 맛집들이 그렇게 생겨도 여전히 당근케익은 세시셀라가 최고더라, 등등 공감은 안 되지만 그런가 보다 싶은 강남 문화들. 애인과의 긴 대화 끝에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와 닿지 않는 이 식당의 감성은, 지금은 거의 40대가 된 강남 X세대들이 결혼정보회사건 어디를 통해서건 그 시절을 추억하며 만나는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곳만의 갈라파고스화(化)를 설명할 길이 없다.
최근 정재윤의 <서울구경>을 출간한 헤엄 출판사의 편집자인 이슬아는 책의 서평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인간은 누구나 가정법을 할 줄 알고, 이 책은 서울에 살 가능성, 더 창창한 미래의 가능성 등 가능성에 사로잡히거나 그것을 내려놓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지방 도시에서 태어난 내게도 서울은 언제나 가능성의 도시였다. 세기말만 해도 지방 애들은 서울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뭘 하며 노는지 보고 듣지 못한 채 단절되어 환상에 가까운 것만 품고 살았다. 애초에 ‘강남 문화’라는 것도 강남의 비약적인 성장세를 통한 부(富)의 집결이라는 시대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시절엔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K-대중문화의 근간이기도 한 미국 힙합을 최전선에서 맞이할 수 있었던 강남 키드들의 문화 자산이 이따금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요즘은 얘기가 다르다. 온라인 메신저도 서울은 버디버디를 쓰고 영남권에서는 세이클럽을 쓰던 시절은 가고, 강북에 살든 지방에 살든 모든 정보들은 실시간으로 유튜브나 SNS에서 다 얻을 수 있다. 당장 어떤 문화를 즐길 인프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언정 뭐가 유행이고 대세인지는 다 알고 있다는 얘기다. 애초에 (밖에선 모르는) ‘OO 문화’라는 말이 의미가 없어졌다. 훗날 지금의 2030이 기성 세대가 되면 그 때는 강남 출신만 아는 강남 문화란 장벽은 꽤 많이 허물어져 있을 것이다.
혹자는 서울의 팽창이 심화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경기권으로도 돈이 몰릴 것이라 전망한다. 하지만 기형적인 입시 경쟁과 대학 구조 등 각종 다양한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서울의 부동산 가격은 쉬이 잡히지 않을 테고 지역 균형 발전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대한민국 땅 안에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점점 더 극명한데 그 사실을 시시콜콜 마주하고 알게 되는 시대는 어떤 풍경일까. 영화 <헝거게임>처럼 화려한 캐피톨의 삶을 모니터로 지켜보는 12구역 청년들의 마음일지, 유튜브로 페기구의 음악을 접하며 꿈과 야망을 키우는 지방 소녀의 얼굴이 될지, 아니면 둘 다일지. 90년대의 추억과 천정부지의 부동산 임대료가 키워낸 ‘청담 갈라파고스’를 보며 떠오른 얕은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