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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Apr 02. 2024

비 오는 날의 미술관

- 호암미술관에 다녀온 이야기

장보기를 했다.

갈비를 손질해서 재워두고, 메추리알과 꽈리고추에 간장을 달여 붓고, 오징어채도 양념조림을 했다.

시금치는 다듬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음날 이른 아침 삶아서 나물을 무쳤다.


평일아침 여섯 시부터 마음이 바쁘다.

이따가 8시에 서울 가는 기차를 타야 하니까 빠진 거 없이 준비를 잘해야 한다.

입고 나설 옷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부엌으로 후다닥.


냉장고에서 어제 만들어둔 밑반찬들을 꺼내놓고, 냉동실의 얼음팩도 하나 꺼내서 튼튼한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둔전둔전 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촉박해진다.

춥지 않게 옷을 챙겨 입고, 편한 신발을 신고, 양손은 무겁게 일단 내차를 타고 출발!


기차역 임시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고 수년만에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기차시간이 넉넉히 남아서 커피를 한잔 사 고 대기실에 앉았다.

"지금도 무궁화호 기차가 다니는구나!

난 SRT 타고 한 시간 40분이면 서울에 가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수서행 기차를 탔다.


눈이 아플 만큼 차창밖을 흘겨보았다.

기차를 타는 일이 내게는 손꼽을 만큼 드문 일이라 낯설고 잠도 오지 않았다.

창밖엔 참 어정쩡한 풍경이 볼품없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들한테서 톡이 온다.

10분쯤 늦게 도착한 시간에 맞춰 아들이 차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왔다.

늘 내가 아들마중을 했었는데, 아들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 반갑고 신기하다.


"엄마, 호암미술관에 이런 전시가 있는데 구경 갈래요?"

얼마 전 아들이 내게 이런 의견을 묻길래 ,

"웬 떡이냐? 오케이" 이렇게 아들과 미술관 나들이가 성사된 거다.


관람예약시간이 넉넉히 남아, 아들집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무겁게 들고 간 보따리를 풀어서, 재운 갈비를 익히고 밑반찬을 덜어 놓고, 즉석밥을 덥혀서 아들과 겸상으로 든든한 식사를 했다. 아들도 엄마밥이 맛있는지 즉석밥 두 공기 클리어.

오늘 휴가 내고 엄마 가이드를 맡아주니 잘 먹여야지.


용인 에버랜드 곁에 있는 호암미술관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가는 길, 호암미술관 가는 숲길이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아들은 여자친구와 이 미술관에 다녀온 후에, 엄마에게도 이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내게 먼 길 나들이를 청해 온 것이었다.


오후 두 시부터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불교미술품을 관람했다.

전시의 제목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2024.03.27~2024.06.16)>.

불교문화와 여성에 관한 주제로 동아시아 불교미술품 92점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문화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단순히 신앙에의 염원에 그치지 않고 후원자, 제작자로서도 그 흔적을 뚜렷이 남겨두고 있다. 왕실여성들의 두터운 후원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불화, 발원문, 조각품들이 조성돼 오랜 역사 속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믿을 수없을 만큼 섬세하게 공력들인 자수작품 역시 불교 예술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여성기술자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평일 관람이라 관람객이 많지는 않았다.

열심히 손글씨로 기록하며 관람하는 학생, 아기를 데리고 관람하는 젊은 부부, 질문이 많은 여성노인까지, 전시작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두 시간 정도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호암미술관은 '희원'이라는 정갈한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크고 작은 석물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정자와 연못, 수형이 빼어난 나무들이 마땅한 곳곳에 빠짐없이 서있다.

남쪽보다는 온도가 낮아서인지 매화가 이제 피었다.


여태보아온 매화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싱그럽고 통통한 매화, 실컷 보고 향기를 맡고 사진을 찍었다.

작은 언덕을 오르는 길에는 꽃색깔이 유난히 짙은 진달래가 한 그루 피어있다.

이 정원을 가꾸는 손길들은 어떤 비결을 가졌길래 이렇게 싱싱하고 향기로운 나무와 꽃을 만들어 놓았을까?


전시관에서의 관람보다 희원의 매력에 더 빠져버렸다.

여우비가 살포시 내리는 정원, 오랜 세월 가꾼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분위기, 다리도 쉬고 시간도 보낼 겸 미술관 앞 찻집, 태극당으로 향했다.

나는 따뜻하고 달달한 유자차를 마시고 아들은 오트밀이 들어간 까페라떼를 마셨다.


다시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차가 막힌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마음 졸일뻔했다.

아침에 아들을 만났던 곳에서 아들과 헤어졌다.

비 오는 날 아들과 함께 보낸 꿈같은 하루가 금세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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