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가 넷이나 된다고 딸걱정을 하시더니, 지금쯤 하회탈처럼 웃고 계실 사장님 얼굴이 그려집니다.
외동딸이 공부 잘해서 의사가 됐고, 의사 사위도 얻으셨다면서요.
함께 일한 지 10년이 넘도록 제겐 자랑한마디 안 하셔서 소문 듣고 알았잖아요.
아들손주만 넷인데, 할아버지가 보내주는 나물반찬만 찾는다고 철철이 산나물, 버섯 따다가 보내주시고, 저도 덕분에 잘 얻어먹었죠. 손주들이 할아버지한테만 매달리고 졸라대서 쌈짓돈 다 털린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전 부럽기만 했답니다. 마님에게도 지극정성이라 최고 좋은 과일만 들여가시고, 참 버릴 것 없이 귀감이 돼 주신 정사장님!
시절인연이 여기까지인가요?
부동산 개발이 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그마저도 이젠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라 저는 쉬게 됐어요.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막히면 저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지잖아요.
우리 주변에도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의욕에 넘쳐 화려한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던 그분들을 부럽게도, 불안하게도 보고 있었는데 결국......
정사장님!
제가 일을 놓고 있는 걸 섭섭해하지 마세요.
안전제일주의자로서 위험을 감지하고 멈추는 건 저의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제 그릇보다 넘치는 욕심은 모두에게 화를 부르죠.
처음엔 일없이 적적하고 좀 불안하더니, 요즘엔 저도 한량생활이 바빠요.
춤추고, 장구 치고, 음악 듣고, 글 쓰고, 책 읽고, 산에 가고......
이러다가 또 무엇이 될지도 몰라요. 하하.
저는 무슨 직업체험이 팔자인가?
대학병원 간호사가 보건교사가 됐다가, 공인중개사가 됐다가, 건축현장 소장이 됐다가, 소규모디벨로퍼로 은퇴했습니다. 아직은 젊은 노년이니 혹시 모르죠. 말년에 직업운이 또 있을지도?
운전 중에 설비차량이 제 앞이나 옆에 설 때가 있어요.
사장님 생각이 나요.
"우리 정사장님도 저런 자재들을 싣고 오고 가고 하셨는데."
혼자서 두런두런하고 덕담을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땐 좀 무서웠고, 한창 일할 땐 구세주처럼 반가웠고 믿음직했고, 지금은 감사하고 그리운 정설비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