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수분 Jun 19. 2024

정 설비 사장님께

어쩌면 아빠, 어쩌면 오빠 같은

사장님은 여전히 바쁘시죠?

너무 일찍 여름이 와 버려서 올해 7, 8월은 어찌 보낼지 걱정입니다.

더구나 밖에서 일하시는 사장님은 더욱 고생하시겠군요.


정사장님, 정설비 사장님!

남들도 그렇게 부르고 심지어 사장님 본인도 자신을 "정 설비요" 하셨죠.

우리 현장의 독보적 해결사!


제가 현장에서 일이 좀 꼬일 때가 있으면 사장님께 먼저 연락을 하곤 했지요.

저만치서 사장님만 나타나면 전 저절로 화색이 펴지고 마음이 놓였답니다.

사장님은 제게 만능키(?) 같은 지원군이었죠.


요즘은 제가 건축일을 쉬면서 사장님을 못 만나고 있네요.

전 이제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소규모 건축현장도 많이 줄었더군요.


분진망 쳐진 건축현장옆을 지날 때면

"아휴! 내가 저런 현장을 어떻게 꾸려갔을까?"

저절로 혼잣말이 나옵니다.


다행히, 무사히 지나온 제 사업의 일등공신은 단연 정사장님이십니다.

현장이 개설되면, 땅 파는 날부터 준공검사일까지 사장님의 손길이 꼭 필요했지요.

설비분야가 아닌 데서 일이 생겨도 문제해결을 위해 달려와 주시고......


최근에는 동생 사업장 개설을 도와주신다고요?

동생들까지 현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술을 가르치시더니 보람이 크시겠습니다.

삼 형제가 같은 분야의 엔지니어가 돼서 얼마나 든든하신지요.

큰 형님에게서 엄하게 훈련받더니 각자 독립해서 살림을 하게 됐군요.




손주가 넷이나 된다고 딸걱정을 하시더니, 지금쯤 하회탈처럼 웃고 계실 사장님 얼굴이 그려집니다.

외동딸이 공부 잘해서 의사가 됐고, 의사 사위도 얻으셨다면서요.

함께 일한 지 10년이 넘도록 제겐 자랑한마디 안 하셔서 소문 듣고 알았잖아요.


아들손주만 넷인데, 할아버지가 보내주는 나물반찬만 찾는다고 철철이 산나물, 버섯 따다가 보내주시고, 저도 덕분에 잘 얻어먹었죠. 손주들이 할아버지한테만 매달리고 졸라대서 쌈짓돈 다 털린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전 부럽기만 했답니다. 마님에게도 지극정성이라 최고 좋은 과일만 들여가시고, 버릴 것 없이 귀감이 주신 정사장님!


시절인연이 여기까지인가요?

부동산 개발이 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그마저도 이젠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라 저는 쉬게 됐어요.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막히면 저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지잖아요.

우리 주변에도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의욕에 넘쳐 화려한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던 그분들을 부럽게도, 불안하게도 보고 있었는데 결국......


정사장님!

제가 일을 놓고 있는 걸 섭섭해하지 마세요.

안전제일주의자로서 위험을 감지하고 멈추는 건 저의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제 그릇보다 넘치는 욕심은 모두에게 화를 부르죠.


처음엔 일없이 적적하고 좀 불안하더니, 요즘엔 저도 한량생활이 바빠요.

춤추고, 장구 치고, 음악 듣고, 글 쓰고, 책 읽고, 산에 가고......

이러다가 또 무엇이 될지도 몰라요. 하하.


저는 무슨 직업체험이 팔자인가?

대학병원 간호사가 보건교사가 됐다가, 공인중개사가 됐다가, 건축현장 소장이 됐다가, 소규모디벨로퍼로 은퇴했습니다. 아직은 젊은 노년이니 혹시 모르죠. 말년에 직업운이 또 있을지도?




운전 중에 설비차량이 제 앞이나 옆에 설 때가 있어요.

사장님 생각이 나요.

"우리 정사장님도 저런 자재들을 싣고 오고 가고 하셨는데."

혼자서 두런두런하고 덕담을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땐 좀 무서웠고, 한창 일할 땐 구세주처럼 반가웠고 믿음직했고, 지금은 감사하고 그리운 정설비 사장님!

모든 짐 혼자 짊어진 저에겐 아빠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했던 정사장님!

좋은 날 받아서 꼭 식사대접 해드릴게요.

이 동네에서 제일 멋진 식당, 까페로 모시겠습니다.

부부간에 건강해로 하시고, 자손들 번성하고 두루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2024년 6월 19일 / 이사장 올림





이전 07화 엄마-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