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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경천 화암사"

잘 늙은 절 한 채-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 사랑' 중

by 화수분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그리운 여우] 창비시집,1997



비 온 뒤, 혼자 가고 싶은 절이 완주 경천의 <화암사>다.

누가 나에게 처음 화암사를 알려 주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물론 안도현 시인은 아니다(큭).


한 이십 년도 더 전에 알아 버렸고,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린 후엔 나 홀로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비 온 뒤엔, 아주 작은 폭포가 수도 없이 만들어져 발걸음을 붙잡고

첫눈이 온 뒤 찾아가면, 잔설이 내려앉은 풍경이 한없이 포근해서 온갖 근심을 다 덮어 준다.


엊그제 점심 때나 돼서 화암사에 가려고 나섰다.

눈이 내린 지 며칠 된 것 같은데 아쉬운 대로 한 번 가보자.

아침은 누룽지를 먹었고,

점심은 화암사로 들어가는 길이 꺾어지는 데, 밥집'정승댁'에서 먹어야겠다.


잔돌이 깔린 마당에 주차를 하고,

식당에 들어서니 예쁜 주인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손님은 없고 주인은 퇴근 준비를 하는 참인가 보다.


예전에도 몇 번 들러 집밥 같은 식사를 했던 기억 때문에 일부러 들렀는데.

제일 빨리 되는 밥,

순두부 백반을 주겠다고 하시니 '땡큐'를 연발하고 다소곳이 밥을 기다렸다.


입천장이 벗겨질 듯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창 밖에 함박눈이 얌전하게 내린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안도현 시인이 길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달리면

오랜만에 와도 길을 잃지 않는다.

예전에 항상 헷갈리던 삼거리도 이젠 안심이다.


주차장엔 차가 두 대 서있다.

오는 길에 눈이 그쳐서 아쉽지만 신발을 갈아 신고 쓸쓸한 풍경 속으로 걸었다.

여기 초입의 풍경이 나를 그렇게 이곳으로 불러들인다.


나무계단이 놓여서 발디딤이 위험한 곳은 이제 없다.

한 20분만 걸어도 '타임머신을 타고 온 건가?' 싶을 만큼 속세와 먼 느낌을 주는 절집을 만난다.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고 나면 저기 높은 곳에 절지붕만 얼핏 보인다.


늦은 가을에 오면 은행나무 몇 그루가 온통 황금 보료를 깔아주는 황홀한 절입구를 맞닥뜨린다.

한 십 년 전에, 황금보료 같은 은행잎 마당에서 우리 강아지 달래가 절집 검둥이한테 살짝 물린 적이 있다.

검둥이는 순하고 사람 잘 따르는 강아지였는데,

그 녀석이 내게 와서 친한 척 다리를 부비니까 우리 달래가 '왕--'

두 녀석이 순식간에 엉겼다가 떨어졌다.

달래 등에 이빨자국이 한 점 찍혔다.

내 등에 식은 땀이 한 줄 흘렀다.

이젠 우리 달래도 떠났고 절집 검둥이도 보이지 않는다.


완주 화암사는 국보를 가진 절이다.

화암사 극락전이 국보 제316호로 지정돼 있다.

'하앙식 구조'로 건축된 희귀한 목조 건축자료가 이 극락전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괘불도, 닫집, 편액, 동종, 우화루(雨花樓)등 역사적가치를 인정받는 보물들을 품고 있는 절이다.

고려 충렬왕 때 지어져서 여러 번 중창된 역사가 중창비에 기록돼 있다.

소박한 절집들과 마루, 미음자 마당, 고고한 해우소, 우화루의 고색창연한 세월을 들여다보고,

사람 하나 없는 화암사를 등지고 산을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남녀 두 사람이 화암사를 향에 걸어간다.

화암사는 귀하고 쓸쓸하고 소박하고 단정한 절이다.

그래서 나는 화암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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