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간, 곁에 있는 고요를 알기
새벽부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일곱 시에 일어났다.
거실창밖에는 밤낮으로 몸을 불리는 새싹 벼포기가 파르르 하니 줄지어 서서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흰 왜가리가 벼논 위를 맴돌고 약간 깊은 논바닥에 고인 물은 햇빛에 반짝거린다.
오늘은 목요일.
이따가 저녁시간에 지인들을 초대했으니 오늘 난 바쁠 참이다.
장은 어제 봤고, 청소기도 어제 돌렸고,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 시간은 충분하다.
커피를 내렸다.
냉장고에서 엊그제 먹고 남은 롤케익 한 조각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뎁혔다.
소파에 앉아 커피와 케익을 먹었다.
케익은 다시 조금 남겼다.
라디오를 켜고 물걸레질을 했다.
혼자 사는 집이라 어지를 일이 없으니 먼지만 닦으면 집은 늘 깨끗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물건들도 편안하다.
청소는, 청소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기쁨이 있다.
나 혼자라도, 청소한 후 상쾌함 때문에 어떤 세리머니가 필요한데 오전이라 참았다.
오후였다면 맥주 한 캔을 유리잔에 따라서 거실의 긴 테이블에 앉아 벌컥벌컥 마셨을 것이다.
오늘은 저녁 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지금 안 마셔도 전혀 아쉽지가 않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는 중이다.
유작가가 2009년 처음 썼던 책을 증보판을 거쳐 올해 다시 특별 증보판을 낸 책이다.
"젊었을 때 들고 다니던 지도를 다시 그린 것"
이라고 작가 후기에 쓰여있다.
우리 시대에 사회적 공감대가 두터운 유작가의 지도를 따라 걸어 보는 중이다.
그가 추천한 책들 중에는 읽어 본 것도 있고, 유명하지만 읽지 않은 책들도 있다.
그 책들을 다 찾아 읽지는 않겠지만, 유작가와 동행하는 기분으로 그 지도를 따라가 본다.
일순간 책을 내려놓았다.
"고요함"을 감지했다.
비행기 소리, 농기계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 선풍기 소리...
온갖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고요함.
아무 걱정도 없고
화남도 없고
아픔도 없고
자유로운 의식만이 나를 채운 고요함.
저녁시간에 초대한 6명의 손님.
냉장고 속에 그득한 음식재료들.
저것들로 무슨 요리를 만들어 상차림을 할까 하는 궁리.
그런데도 이 순간은 부산한 마음,
일도 없다.
마음속의 고요를 인지하고 안도함!
잠시 순간일지라도, 멈추어 평온을 흡수하는 이 시간이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 흐벅지게 부푼다.
이따가 저녁나절에 내 젊고 친절한 친구들 오시요.
요즘 많이 나오는 햇 완두콩밥에,
소고기 뭇국에,
묵은지에 돼지고기 목살 달달 볶은 김치찜,
꾸덕하게 손질한 조기구이 한 마리씩,
갖은 양념하고 무쳐낸 나물과
시래기 표고버섯 들깨 탕,
잔멸치 땅콩 조림,
유기농 채소에 과일 넣고 감칠맛 나는 발사믹 식초를 곁들인 샐러드,
당신들이 가져오기로 한 각종 술에,
와인으로 마무리하는 오늘 밤을 기대하시오!
앗, 고요함 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