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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Sep 05. 2023

하룻밤 체험, 엑스트라

하정우가 왔대!


하정우가 왔대!

크고 둥근 보름달 같은 조명아래 뿌리 깊은 나무기둥처럼 버티고 서있는 사람.
"언제 왔대?"
"난 못 봤는데?"
효현이가 그가 왔다고 알려줘서야 얼른 쫓아가 봤다.
'늠름하다는 것은 저런 모습이겠구나'
새삼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며 남자주인공 '하정우'를 지속적으로 훔쳐보았다.



정확히 어떤 역할 인지는 모르지만  말없이 묵묵히 촬영장의 중심구역에 그가 서 있다. 가무잡잡한 얼굴, 두툼한 목선, 장갑 낀 단단한 주먹, 어깨, 몸통, 그리고 시선.
다른 영화에선 찰지게 욕 잘하는 깡패 역할도 어울렸지만 여기서는 납치된 국민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해 와야 하는 히어로의 역할에 딱 맞게 든든한 구세주의 면모를 갖추고 그가 서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인가' 내심 억울해하던 터에 뜻밖에 하정우 배우의 절제되고 과묵한 촬영 모습을 보면서 위로와 보상이 저절로 되는 듯 가슴이 뿌듯해졌다. 어차피 중간에 돌아갈 수도 없다.

내 인생에 한번 있는 일, 구경삼아 즐기다 보면 끝이 나겠지.
"아이고ㅡ" 소리치며 달려보자.





충남 부여의 외딴곳, 동네와 떨어진 삭막한 겨울 논바닥에서 영화를 찍는다.

그것도 밤시간이라 괴괴한 분위기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금세 현실감이 사라지고 '시간여행 온 건가?' 싶게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큰 도로가에 버스 몇 대가 서고 옛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서고, 2월달 어설피 춥고 맵싸한 들바람에 웅크리며 모두 논길로 걸어 들어간다.
유치원생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엑스트라는 백여 명이 넘고 조주연 배우와 스텝까지 합치면 이백 명도 넘을 법한 인원이 논바닥에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논과 논사이에 수로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버스와 지프도 오고 가고, 조감독의 마이크 구령에 맞춰 사람들도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모이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난 두세 시간 찍으면 되는 줄 알고 재미로 가볍게 오케이 했는데 설마설마하다가 밤샘 촬영을 하게 됐다.
1970년대 우리나라 비행기가 북한에 납치되고 영웅적 인물의 활약으로 승객들이 무사히 송환되는 내용의 영화라고 했다.
납치됐던 승객들이 육로로 돌아오는데 판문점 초소, 다리, 그 시절의 버스, 지프, 각종 조명, 북한군, 미군, 기자, 젊은 남녀 승객들이 준비돼 있다. 몇몇 어린이들과 나이 든 남녀들은 송환되는 승객을 마중 나온 가족들이다.



분장팀에서 내게 부잣집 마님 같은 한복을 입혀줬다. 아주 잘 어울린다며 엄지 척을 해주고는 머리도 약간 손질해 주고 빨간 립스틱도 발라 주었다. 한복 속에 내 옷을 껴입어서 추위는 견딜만했다.
함께 간 효현이가 춥게 입었는데 버스 타는 씬이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젊은 효현이는 납치된 승객 역할이고 나이 지긋한 나는 마중 나온 가족 중 할머니로 분장시켜 준 것 같았다.



촬영현장과 조금 떨어진 마을에 규모가 큰 공공시설을 빌려서 식사도 하고 분장도 하는 지원캠프를 차려 놓았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각각의 역할에 따라 분장을 하고 모여 있는 모습이 서로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됐다. 엑스트라 한 사람씩 일일이 옷과 신발, 장신구, 안경등 시대물에 맞는 분장을 하느라고 긴 줄을 서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특히 북한군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은 정말 북한군처럼 보이고, 유엔군 군복을 입은 서양남자들은 진짜 직업 군인처럼 보였다. 환복 하기 전에는 껄렁한 랩가수들처럼 보이더니 반듯한 제복을 입혀 놓으니 조금 전에 눈으로 보았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싹 가셨다. 



어떤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인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겉모습으로는 상대방을 알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시시때때로 분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삶인가 보다 생각하니 퍽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구경이라도 하고 있으니 긴 시간을 버틸 만 하지 안 그랬으면 붙임성 없는 내가 줄 서서 한 시간, 두 시간을 묵언수행하듯 보낼 뻔했다.



엑스트라 인원들을 모집하고 통솔하는 기획사가 지역별로 있는지 촬영팀은, 우리를 데리고 간 사람을 '전주팀장 '이라고 불렀다. 전주에서는 버스 두대가 갔고 뒤늦게 서울에서도 버스가 두대가 왔다.
개중에는 엑스트라로 촬영현장에 다니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도 있어서 서로 인사도 하고, 쭈뼛 거리는 우리들에 비하면 태도가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아가, 추워서 어떡하니"
여섯 살이라고 말해주는 남자아이가 우리들 속에 섞여서 반복 촬영을 하고 있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두 살 때부터 촬영을 해서 밤에도 많이 찍었어요."
얼마나 의젓하고 자세가 꼿꼿한지 순간 이 어린 배우를 나보다 어른으로 여길 뻔했다.
난 마지못해 뛰어가는 시늉만 하고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곳으로만 달려가고  언제 끝날 건가 시간만 재고 있는데 의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인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프로연기자의 자세가 느껴졌다.
작은 하정우를 보는 것처럼 듬직했다.



'작은 하정우'는 카메라가 집중해서 찍는 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우였다.
납치된 승객 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서 송환장은 통곡의 장이기도 했다.
아이의 아빠도 돌아오지 못한 고위급 장교였나? 어린 배우는 아빠의 군모를 쓰고, 통곡하는 엄마를 따라 눈물범벅이 되는 장면을 여러 번 찍었다.



몹시 추운 새벽까지 장시간 촬영 중에 스텝들은 어린 배우들을 특별관리 해주고 있었다. 쉴 때마다 담요를 덮어주고 연기가 끝나면 눈물을 닦아주고 천막 속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잠을 이기고 밤샘촬영을 하는 어린아이의 고충이 어떠할까. 벌써 단련 돼가고 있는 어린 배우의 길이 성공의 길이 되기를 빌어 주었다.



유명 배우는 아니어도 중요한 역할이 정해진 배우들도 여럿이 있었는데 그 추위에 스커트와 하이힐을 착장하고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면서, 저들도 어린 배우처럼 단련의 길을 걸어왔겠지 생각하면서도 내 발 시린 것이 더 딱해서 동동거렸다. 새벽 동이 트자 밤샘 촬영을 마치고 의상을 반납하고 어제 타고 왔던 버스에 올라 한숨 자고 나니 전주에 도착했다.



엑스트라 체험, 주인공 배우 직관, 의젓한 어린 배우의 면모, 여성 조감독의 카리스마 등 영화촬영장의 갖가지 풍경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것 같다. 수고비는 최저시급으로 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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