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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수분 Oct 08. 2023

가을 지리산 종주(2023.10.2~10.4)

- 하늘, 구름, 단풍 (33.6km)

지난 오월에는,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 하산.

장터목 대피소에서 새벽 악천후 때문에 천왕봉엘 못 가보고 하산을 해야만 했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랠 겸 여행친구 우정이와 지리산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무비언니까지 셋이서 추석연휴에 종주등반을 하기로 했다.


대피소 예약이 손가락 순발력이든, 광속 케이블이든, 나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우정이가 모든 과정을 수고롭게 진행해 주고, 출발일 새벽 차량봉사까지도 우정이 남편 김샘이 맡아주어 하늘만큼 감사했다.


성삼재 주차장에 8시 도착!

김샘도 노고단까지는 함께 올라가기로 했다.

우정이 배낭을 매 주던 김샘은 "이거 매고는 절대로 못 갈 거 같아"라고 열 번도 넘게 걱정을 쏟는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각자 정비를 단단히 하고, 노고단 고개에서 커피를 한잔씩 나누고 김샘과는 헤어졌다.


그동안 내가 우정이와 여행을 떠날 때마다 아침커피는 항상 김샘표 핸드드립을 마셨다.

이른 새벽에 정성 들여 내려준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 우리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그 향기가 코 끝에서 맴도는 듯 행복했다.


고마워요! 

우정이 서방님!


노고단까지 함께 가는 우정이 부부!




지리산 종주를 하기에 이보다 좋은 계절이 있을까?

숨 가쁜 산행에도 고개를 들면 청명한 바람과 코발트빛 하늘이 금세 기운을 채워준다.

그 덕분에 또 미소 한번 짓고 뻐근한 다리를 이끌고 고도를 높여 전진해 간다.


추석 연휴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많지 않고,

봉우리마다 한가로이 사진 찍고 멀리 풍경을 조망하기에도 여유롭다.


우리는 2박 3일 일정으로 성삼재 - 중산리 종주를 계획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산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무박종주, 왕복종주, 화대종주(화엄사 - 대원사), 단독종주, 달리듯 종주하는 사람 등등.


혼자서 산에 온 사람들도 의외로 여럿이다.

자신의 짐을 지고 묵묵히 홀로 걷는 사람에겐 특별한 매력이 있다.

세상살이에서 길을 찾으려고 지리산에 와서 고단한 산길을 홀로 걷고 있다.


어떤 목표로 이 산에 왔든 오가며 인사하고, 함께 휴식하고, 소량의 간식도 권하고 나누어 먹다 보면 친근한 마음이 생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 이틀 사흘, 지리산에서는 아는 사람이 돼버린다.

대피소에서도 서로 챙겨주고 걱정해 주는 배려가 저절로 생겨버린다.


첫날 산행은 아침 8시에 시작돼 오후 4시가 넘어 끝났다(13.5km).

우리 세 사람도 각자 발걸음이 다르니 먼저 가고 뒤에 오고 그랬다.

세 사람 모두 무리 없이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서 해 넘어가는 풍경을 나무사이로 아쉽게 조금 보았다. 연하천 대피소는 마당에 샘물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물맛도 일품이다.


배낭을 풀고, 불 피워 끓이고, 헛헛한 배를 채우고, 땀을 씻고, 뼈아픈(?) 대피소 자리에 누웠다.

대피소 맨바닥에 몸을 뉘면 등뼈가 닿고, 팔베개를 받치고 돌아 누우면 고관절이 배기고, 푹신한 침대를 그리다가 선잠이 든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아침이다.


"변덕스러운 당신, 살만하면 지리산에 오지 말라"는 오래전 팻말을 붙여놓은 연하천대피소


올해 첫, 예쁜 단풍을 등지고 서있는 연하천 대피소 마당 끝자락의 이정표




둘째 날, 오늘은 한량 놀음을 해도 된다.

연하천에서 9.9km 거리의 세석 대피소까지만 가면 된다.

장터목까지 3.4km 더 가면 좋은데 화장실 때문에 죽어도 거기서 못 잔다고 우정이가 특별히 세석으로 정해줬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있다면 선택할 수 없는 장터목대피소의 화장실.


여유롭게 연하천 마당에서 아침을 해 먹고, 우정이가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도 한잔 마시고, 늑장을 부리며 꼼꼼하게 배낭을 쌌다. 무거웠던 배낭이 가뿐해졌다고 해맑게 웃는 우정이가 천진하게 보였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가는 초입, 예쁜 데크 오솔길에서 사진을 몇 컷 찍고 출발!


초반에 친절했던 등산로가 뾰족한 바위와 급경사로 애를 먹인다.

먼 능선을 보면 완만하고 순순하니 한없이 너그럽게만 보이는 지리산이지만, 뾰족 바위와 하늘로 서 있는 계단을 곳곳에 숨겨 놓았으니 처음 오실 분들은 그리 아시라!


벽소령으로 가는 길에 구름이 드리워진 종주능선을 조망함


컨디션이 좋았는지 지치는 줄 모르고 3.6km 거리를 한 시간 10분 만에 도착했다.

벽소령 대피소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식수가 나오는 수도꼭지도 있다.

어제 연하천대피소에서 함께 묵었던 낯익은 얼굴들도 미리 도착해서 휴식을 하고 있다.


난 우정이와 나무비언니를 기다린다. 

늘 내 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뒤에 오는 일행의 도착사진을 찍어준다.

오는 길에 넘어졌다고 징징 너스레를 떠는 우정이의 영상을 찍어뒀다.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난다.


벽소령 대피소는 높은 산에 있어도 아늑한 시골집 같다.

앞마당에 나무 식탁과 의자가 많아서 쉬는 사람들도 여유가 있고,

꽃씨를 받느라고 망을 씌워놓은 들꽃을 보면 산골 할머니가 사는 집 같기도 하다.

능선길에서 만나는 고운 들꽃들은 국립공원 관계자들의 이런 노력으로 준비된 선물이겠지.


가는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서 아직 쉬고 있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먼저 출발했다.

뒤에 오던 나무비언니가 느림보 두 사람을 더 챙겨 와서 일행이 늘었다.

서로 보살피고 사드락거리며 올 것이니 나는 내 속도대로 먼저 가본다.


종주등반 중에 만나는 아늑한 쉼터!




벽소령 대피소 앞 들꽃의 씨를 받는 꽃망(?) 씨망(?)



벽소령에서 6.3km 거리에 있는 세석대피소가 오늘 잠잘 곳이다.

벽소령 출발도 산책하듯 오솔길과 돌담으로 시작된다.


마른 잎 아니고, 싱싱한 단풍이 제법 시야를 물들이고 한 시간 가까이 오르락내리락 고단해질 무렵 덕평봉을 넘어 선비샘을 만났다. 물줄기가 끊길 듯 희미해서 한참을 기다려 한 모금 맛보았다. 

능선에서 만나는 샘물, 옛사람들에겐 참 반갑고 귀하고 요긴한 생명수가 돼 주었겠다.


선비샘의 가냘픈 물줄기


빗소리가 후드득거린다.

몸을 적실만큼은 아니지만 구름이 심상치 않다.

앞으로 두 시간 가까이 걸어야 세석대피소에 도착할 텐데 큰 비는 좀 참아주길 바래.


칠선봉을 넘고, 주능선의 남은 봉우리들을 보여주는 멋진 조망터를 지나면 영신봉이다.

이제 600m만 가면 오늘의 목적지 세석대피소가 나온다.

빗방울은 아직 찔끔거리고 오후 1시 40분 세석 대피소에 도착, 배가 고프다.


가파른 오르막도 숨 막히고, 가파른 내리막도 아찔하다.



세석대피소의 지붕만 보여도 반가워서 한달음!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큰 비 오기 전에 모두들 도착했다.

오후 4시가 넘어 점심(?)을 해 먹고 치우고, 젖은 옷 갈아입고 몸단장하고 잠잘 준비를 마치자 6시.

이 밤을 또 어떻게 보낼거나 막막 해진다.

우리보다 먼저 취침준비를 마친 여성 산객들이 홑겹 침낭을 쓰고 누웠으니, 우리도 말소리를 삼가고 돌아 누워, 눈을 감고 지나온 산길을 되짚어 본다.




새벽 4시 반 기상!

아침밥은 장터목에 가서 먹기로 하고 5시 출발!

아직 깜깜한 하늘에 비는 그치고 흰 달과 새벽 별이 총총하다.

산아래 마을의 불빛이 점점이 아련하다.


멀리 여명에 물드는 남쪽, 하늘인지 바다인지.


오늘은 세석대피소 출발, 장터목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법계사 - 중산리로 하산.

10.5km를 걷고 귀가하는 일정이다.


이마에 랜턴을 밝혀 쓰고 따박따박 걸어 올라 30분 만에 일출이 좋은 촛대봉에 도착했다.

일출은 아직 일러 어둠 속에서 사진을 한 장씩 찍고 또 걸었다. 


이정표를 만나면 남은 거리확인!


지리산 능선의 백미라서 '연하선경'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러주는 그 코스를 어둠 속에 걷고 있다.

곧 날이 밝을 것이니 다행이고 어젯밤에 비가 그쳐 다행이다.

해가 나면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맑은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바위와 돌에 발끝이 자꾸 걸린다. 

서서히 여명이 터오는데 시야를 가리지 않는 곳에서 일출을 보고 싶어서 걸음이 부산해진다.

동쪽 하늘도 진주알 같은 해를 앉히려고, 붉은 방석을 깔아 놓느라  부산스럽다.


서서히 어둠을 벗기고 길과 나무와 바위를 보여준다.


"여기서 잘 보여요. 올라오세요."

좁은 바위 한쪽을 내주며 친절하게 응대해 주는 중년 여자분 곁으로 자리를 잡았다.

딱 두 사람 앉을 만한 바위 앞으로 시야가 트이고 손톱만 한 태양이 빛을 쏘아 올리고 있다.

사진, 영상, 소원빌기를 마치고 일출에 물든 봉우리들을 앞뒤로 조망해 보았다.


연하선경을 둘러보다가 곧 장터목대피소가 보일듯!


'연하선경'을 두루두루 시야에 담고, 장터목을 향해 뻗은 돌길을 따라 구불구불 걷는 발걸음이 어둠 속보다는 가벼워졌다. 일행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면서 곧 장터목에서 만나 아침을 먹게 될 거다. 배가 고파졌다. 새벽 5시부터 산봉우리를 여러 개 넘어왔더니 밥과 커피가 그립다!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에 앉은 초가을의 장터목대피소!


7시 20분에 장터목대피소에 도착!

식수대에 내려가서 물을 길어다 놓고 우정이와 나무비를 기다린다.

우리들과 산행속도가 맞아서 자꾸 마주치는 두 분도 식사를 하고 있다.


오늘 하산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풍경이 따뜻하고 정겹다.

일행들이 도착해서 배낭에 남은 식량과 얻은 음식으로 아침을 해 먹고, 우정이가 내려주는 향기로운 드립커피를 '부르주아 커피'라고 부르면서 여럿이 나누어 마셨다.




쓸쓸하고 멋스러운 주목의 고사목도 점점 쓰러지고.


이제 천왕봉(1915m)에 가야 한다.

장터목에서 1.7km, 1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다.

먼저 고사목의 무덤이라는 제석봉에 오른다.

과거에 비해 고사목도 거의 쓰러지고 우뚝 선 모습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천왕봉을 지키는 수문장 같기도하고 일주문 같기도 한 통천문!


하늘로 통하는 길 -  통천문을 지나 500m만 가면 천왕봉이다.

새해 일출산행을 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 통과하던 곳, 오늘은 프리패스.


표지석만 나온 사진이 없어서 부득이 어떤이의 뒷모습까지.


천왕봉에 올라보니 날씨가 쨍하고 좋다.

사방의 산맥과 산아래 마을과 멀리 남해바다까지 보인다.

지난 5월에 궂은 날씨로 장터목에서 돌아가야 했던 아쉬움이 싹 가시고 맑은 기운을 듬뿍 받고 하산을 했다.


성삼재 - 중산리 2박 3일 종주산행의 종착점!

중산리코스 5.4km를  3시간 40분 걸려서 하산.

고맙게도 나무비언니 아들이 태우러 와주었다.

진안에 들러 흑돼지 구이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귀갓길은 노곤하고 뻐근하고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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