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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것이 있는 삶과 지킬 것이 없는 삶.

파과(구병모)를 읽고

by 꿈에 날개를 달자

나란 사람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증오했던 적이 있었던가? 혹은 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의를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천사도 아니고, 마음이 유난히(?) 착한 편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있고, 질투를 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워낙 잘 잊고, 무심한 스타일이다 보니 그 순간은 화가 나서 부르르 떨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담담해져서 누군가를 오랫동안 미워하거나, 증오했던 적은 없다. 그래서 계획적인 살인을 하거나,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나와 같을 수 없고, 또 어떤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장담할 수 없다. 지킬 것이 많고, 갖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행복할까? 아님 지킬 것이 없고, 갖고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 행복할까?


다른 노인들과 별다를 것 없는 60대의 할머니. 하지만 그녀의 실상은 방역 업(?)에 종사하는 청부 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 조각. 그녀는 40여 년 동안 표적을 단숨에 처리하는 업계의 대모 자리에 앉은 프로페셔널이다. 무정하고 냉혹하기만 한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 촉이 무뎌지고, 감이 떨어질 것을 생각해 행복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또한 여성으로 느껴야 하는 행복도 철저히 무시하며 살고 있다. 환갑을 넘긴 그녀에게 어느 날 생각하지 못한 감정들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고, 폐지를 정리하는 노인의 리어카를 정리해주고, 지키고 싶은 살인 대상자가 생긴 것이다. 청부 살인 업자에게 ‘지켜야 할 그 무언가가 생기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그녀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현재를 오가며 인간의 성장과, 노쇠, 그리고 약해져 가는 모습을 그린다.


평생 강할 것 같은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약해지고, 쇠잔해 간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약함을 발견했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평범한 아버지의 약해짐을 발견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평생 누군가를 죽이며 살았던 청부살인업자가 평범한 인간이 가진 감정을 느끼는 것에 당혹해하는 모습은 아프다 못해 슬프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50)” 감정을 가지지 않고 누군가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죽이는 것.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야 누군가를 감정 없이 죽일 수 있을까?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미련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누군가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고,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새롭게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 세상에 그 어떤 감정을 내려놓지 않아야 가능한 것일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236) 지킬 것이 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지만 지킬 것이 많을수록 인간의 욕심은 더 강해지지 않을까? 조각 할머니의 삶엔 지킬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감정 없이 사람을 죽였고, 그런 인생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녀의 인생에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그렇게 영혼은 썩은 과일처럼 냄새가 진동하고, 짓물러 터져 나가기 일쑤였다. 지키고자 욕심을 낼수록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지킬 것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조각 할머니. 하지만 나이가 들고 실력이 예전만 못하고, 사람들의 삶들이 하나 둘 자신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조각 할머니는 지킬 것이 없었던 과거가 행복했을까? 아님 지킬 것이 생기기 시작한 현재가 행복해졌을까?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 그리고 소소한 행동을 하는 조각 할머니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지킬 것이 있는 삶과 지킬 것이 없는 삶. 과연 어떤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더 힘이 되는지. 과하지 않다면 지킬 것이 있는 삶이 나는 더 좋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지키고 싶은 아이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과 행복해하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과 함께 웃고,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시간. 오늘 내가 지키고 싶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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