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배 (이혁진)을 읽고
첫 회사에선 연봉제라는 말이 없었다. 호봉이라는 제도 앞에서 내가 가진 계급(?)은 몇 호봉 몇 호였고, 그걸 기준으로 월급과 보너스를 받았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옮긴 직장은 IMF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호봉제가 아닌 ‘연봉제’로 이름을 바꿔 내 월급, 계급을 만들어 버렸다. 연봉제의 기틀은 호봉 안에서 결정되었지만 이건 기존에 있는 직원들을 기준으로 할 뿐, 신입사원의 경우는 그들보다는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부서별 직원별 성과에 대해 논하고 그에 맞게 1년에 한 번 내 연봉에 사인을 하지만,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연봉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억울해도 사인을 해야 했고, 나 같은 신입은 백수가 아닌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때였으니까. 이후 몇 번의 연봉 계약에 사인을 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퇴사를 했고, 나는 직장 생활과 멀어졌다. 이젠 ‘회사원’이라는 타이틀을 달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했던 기업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불합리했고 억울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곳은 혹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 기계의 부품처럼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일할 수 있는 그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일 잘하는 사람들은 그만둘 수밖에 없는 그곳. 줄을 잘 타고 아첨을 잘하고, 눈치와 코치가 있어야 살아남는 그곳. 창의성과 혁신을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그곳.
주인공 문 대리는 ‘배가 쓰러졌으니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고 회사로 간다. 쓰러진 배를 보고 있지만 그 배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으려 한다. 왜 배가 쓰러졌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선가 피해액을 보상받기 위해 보험 팀이 꾸려질 뿐. 쓰러진 배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협의한다. 배는 천재지변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해서 보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쓰러진 배가 눈앞에 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연봉을 받을까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줄을 잘 서 승진할까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 앞에 혁신을 주장하는 황 사장이 영입되는데... 황 사장은 이 회사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님 그들과 똑같이 변해버릴까?
회사 생활이라는 게 말이다 가늘고 길게 해야 하는 건데, 괜히 나서서 뭣 좀 해보겠다고 들면 안 되는 건데. (30)
모든 주체가 책임은 회피하고 이익과 자기 보전만 좇았다. (65)
썩은 배를 어찌할 수 없듯, 썩은 회사도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270)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 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 (286)
처음엔 제목만 보고 세월호를 떠올렸다. 그러나 세월호 관련 내용은 아니고, 쓰러진 배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수습할지에 대한 이야기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것이라고, 회사 안에서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내가 책임지겠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예전보다는 확실히(?) 연봉 높은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예전보다는 훨씬 잘 살게 되었으니 행복도 그만큼 비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린 그동안 무얼 위해 이렇게 노력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그랬다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은 회사를 나갔고, 눈치와 줄을 잘 서는 사람들은 회사에 남아 큰 소리를 치곤 했었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전무, 상무, 사장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살아남아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어도 회사가 망하지 않는 걸 보면 그것도 아이러니하다.
큰소리치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나 역시 소시민이자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난지라 또 그렇게 참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업 문화를 보면 안타깝다. 내 아이들도,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그런 매너리즘에 빠질 테니까. 기업을 보면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보다 나은 기업이나 사회는 정말 없는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이 답답함을 어찌해야 하는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기업은 정녕 없는 것인지.